'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
考 이현수 교수님을 기리며
가을,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그 중 잃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개하려 한다. 지난 10월 31일, 사회과학대(구 문과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이신 이현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산사에 머물다 교수님 부고를 놓친 허전함이, 생각보다 길다. 상실한 후에야 아는 소중함과 자책에, 장지(葬地)라도 찾고 싶었으나,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한 교수님에게는, 아직 장지가 없다. 말년까지 연구와 저술을 멈추지 않으셨던(긍정적 청소년 발달 매뉴얼(학지사, 2022년), 성격강도에 기초한 긍정적 심리치료(학지사, 2021년), 습관과 중독(박영스토리, 2019년), 뿌리 없는 광란 사이코패스(학지사, 2019년), 그 외, 임상심리학, 웃음 영장류의 한 비밀, 역경 속의 성장, 지구촌의 심리학 등) 우리 교수님다운 선택이다.
무엇보다도, 출석 체크 장면이 떠오른다. 1994년 봄,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한 매일의 1교시는 당혹스러움 이상이었다. 매 학기 한 과목 이상 수강해야 했던 교수님 강의는, 1시간씩 3회로 쪼개졌고, 모두 1교시(9시)였다. 만약 펑크 난 과목까지 재수강할 경우, 정말 매일 아침 교수님을 뵙게 되는 셈이다. 이름과 이름 사이의 쉼을 잠시도 허락하지 않은 채 학생들의 이름을 죽 연결해 부르시는, 읊조리듯 나지막한 교수님의 음성은, 출석 체크보다는 흡사 무슨 고문 낭송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이 이미 지나간 후의 입실은, 당연히 결석 처리되었다. 세 번의 결석을 받은 자는 그 학기 시험 점수와 상관없이 F 학점을 받았고, 예외는 없었다. 때문에, 아침의 출석 현장은 허탈과 오열(실제로 많이들 울었다), 환희가 교차하는 격전지였다. 알다시피, 흑석동 대로변에서 버스를 내릴 경우, 육교를 건너, 정문까지 그리고 청룡 연못을 지나 그래, 그 계단, 계단들. 게다가 교수님 전용 강의실이던 2609는, 당시 엘리베이터가 없던 문과대 서라벌홀의 6층이었다. 그러니 그 계단들에서의 막판 스퍼트는 실제로 운명을 건 사투였다. 물론 출석에 성공한 이들에게만 해당하지만, 유난히 긴 아침을 보낸 후 맞는 강의 시간은 평화와 행복감이 충만했다. 정확한 영국식 악센트를 구사하지 않아 받게 되는 강독 지적마저, 은혜롭게 여겨졌다.
선배의, 선배의, 선배들을 통해 내려오는 교수님과 관련된 얘기들. 우리나라 심리학 1세대이신 교수님은 6.25 전쟁 직후 영국으로 떠난, 가난한 나라의 국비 유학생이었다. 언젠가 “집에 돈이 충분치 않으면, 되도록 공부는 선택하지 마라”고 하셨던 말씀은, 그 시절 교수님의 궁핍과 고난의 언어로 짐작된다. 런던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오신 교수님은, 국립정신병원의 임상심리과장을 역임하신 후, 모교인 서울대가 아닌 우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정년 퇴임을 하셨다. 교수님은 각종 학교 행사나, 술자리 등에는 전혀 참석하시지 않고 늘 연구실에 머무셨다. 출근 시간도 워낙 일러, 우리는 거의 강의실에서만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3회 결석이나 학점 불만족의 사정과 관련해서도, 개인적 호소를 잠자코 들어주시긴 하나, 실제로 반영해 준 일은 전무하다는 구전 설화가 워낙 신뢰할 만해, 교수실로 찾아뵙는 일도 극소했다. 교수님은 늘 혼자 다니셨고, 어디서 식사를 하시는 지도 미스터리였다. 언젠가, ‘롯데리아에서 혼자 햄버거를 드셨다더라’, ‘교수실에서 클래식이 아닌 헤비메탈을 들으시더라’라는 풍문이 떠돌며,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동료들에게 경조사를 전혀 공지하지 않아, ‘혼자만 도도하고 깨끗하다’라는 핀잔을 들은 후 절교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 속에, 예의 그 바바리코트와 중절모, 지팡이 차림의 교수님이, 등을 쭉 펴고 그 빠른 걸음으로 악명 높은 문과대 계단을 총총 오르고 계신다.
지독히도 비사교적이었던 교수님이, 우리의 대학 시절 추억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의외이다. 하지만 모임에서, 술자리에서, 앞다투어 교수님 얘기를 하려는 현상 또한 사실이다. 하긴, 수업에 모자를 쓰고 들어오거나, 머리카락이 너무 길다고(남학생에 한정), 하필 빨간 의류(옷이나 슬리퍼까지도)를 착용했다고, 한 두 번 지각하거나 결석했다고, 호된 꾸지람을 받다 못해 강의실에서 내쫓기거나("너 나가라"), 수강 취소를 요청받는 일은, 삶에서 그리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상당히 자의적이고 과도한 규칙처럼 보이겠지만, 그 규칙들은 “C is enough”라는 교수님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 혹은 의미, 스스로 창조한 문화의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대학에 와 우리가 본, 지독히도 융통성 없는 한 ‘어른’은, 친밀하진 않은데 그리 거리감이 들지 않았고, 권위적인 것 같은데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혼란과 고통에서 헤매는 영혼은 누구나 그런 분명함을 원하듯이’, 우리는 교수님에게 그 ‘분명함’을 본 것일까? 흔한 허례와 잘못된 문화를 좇지 않고, 세평에도 초연하다 못해 강경했으며, 원하는 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그분은, 우리가 찾고 싶은 세상의 비밀과 답을 주실 것 같았다. “멈추지 말고 박사까지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라는 교수님의 답장을 끝으로, 나는 교수님께 편지하지 못했다. 교수님이 떠오르고 보고 싶을 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 그래서 교수님의 삶의 의미를 더 정확히 듣지 못한 것은 내 아픔이다.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미나 가치도 모른 채 좇는, 엉뚱한 일들로 삶을 낭비하지 않으셨다는 거다. 끝까지 ‘심리학자’였고, 삶의 마지막에도 할 수 있는 나눔을 실천하셨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낸 후 그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에 오로지 헌신한 삶이었기에, 교수님의 발걸음은 거침없고 가벼웠나 보다.
부지런하게, 성실함을 일상으로 유지하라는 것, 무엇보다도 “C is enough!”라는 것. 그건 어정쩡한 겁쟁이나 회색분자로 살거나 대중 속에 숨으라는 말이 아니라, A의 excellent함을 존경하고, D나 F의 불운함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실제 손을 맞잡아 주는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당신의 C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은, 모리 교수처럼 사교적이거나 광범위한 호감을 사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만 考 이현수 교수님께도, ‘마지막까지 스승이셨던 이’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스승은 영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디서 그 영향이 끝날지 스승 자신도 알 수가 없다” (by 핸리 애덤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