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애틋하고 반짝이는 추억들이 있다. 나는 어릴 적에 70년대 중후반까지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뿔 뿌리를 캐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눈을 부라린다. 맹세코 사실이다! 또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을 도와 어지간한 농사일을 어엿하게 해냈다. 농사일로 고생한 이야기는 삼박사일 늘어놓아도 부족할 정도다. 어렵고 힘든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저수지에서 헤엄치고, 숨바꼭질, 자치기, 제기차기, 말타기, 팽이치기 등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유년의 기억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영향을 준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보면, 깡촌에서 자란 촌놈 특유의 기질이 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서 따라 하다가 금세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게다가 나만의 기질이 나는 좋다. 머릿속에 각인된 유년 시절의 얄궂은 기억이 하나 있다.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가끔 후회하다가도, 그걸 대체할 만한 인생의 즐거움이 또 있었을까 하는 아찔함이 밀려온다.
농번기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귀해진다. 특히 모내기와 벼 베기 할 무렵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막걸리 심부름을 주로 했다. 워낙에 개발이 더딘 시골이라서 변변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나 구멍가게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나름 꾀를 내어 집집마다 달마다 순번을 정해서 막걸리와 라면을 팔았다. 그날도 엄마는 밭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며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야야 막둥아, 니 네거리 이장 집 알지야. 거기 가서 막걸리 세 되만 받아 오니라, 그라고 사기장골 논에서 일하는 느그 아부지한테 갖다 드려라잉.”
나는 입이 댓 발 나와서 낡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이장 집으로 갔다. 가난하고 외진 농촌 마을이지만, 희한하게도 세 개의 조그마한 촌락 단위로 이루어진 동네여서 거리가 제법 멀었다. 이장님네는 큰 항아리에 가득 채워진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 가득 퍼주었다. 막걸리가 가득 담긴 주전자를 들고, 나는 다시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논까지 잰걸음을 옮겼다. 어리고 조그마한 아이에게 주전자는 너무 무거웠고, 논은 까마득히 멀었다. 풀풀 나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걸었다. 걷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들고 있는 손을 요리조리 바꿔가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욕을 모조리 뱉어냈다.
주전자가 출렁이다 보니 찌그러진 뚜껑 사이로 막걸리가 넘쳐 버려지는 양도 꽤 되었다. 주전자는 무겁고, 내리쬐는 강한 햇빛에 배고픔과 더위에 갈증이 밀려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오리주둥이처럼 생긴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천천히 들이켰다. 텁텁했지만 그래도 배고픔 탓인지 약간 달짝지근해서 먹을 만했다.
호기심에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살며시 잠이 오고 몸에 열이 올라왔다. 논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얼굴이 발그레하고 갈지자걸음이 되었다. 그걸 본 아버지는, “어린놈이 싹수가 노랗다”고 노발대발했다. 아버지에게 혼꾸멍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배고프고 목말라서 몇 모금 들이켰다고, 왜 그리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입안에 아까 마셨던 막걸리의 잔향이 달큰하게 남아서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또 막걸리에 취했을 때 왠지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사실 그 후로 나는 막걸리 심부름을 할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몇 모금씩 홀짝였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막걸리와 인생의 동반자가 될 줄이야. 그게 다 강렬한 첫 경험 덕분이다.
군대 복무 시절, 하루는 대민봉사로 옥수숫대를 베러 나갔다. 밭 주인이 막걸리를 가져오더니 고생한다면서 한 잔씩 마시라고 했다. 막걸리를 보는 순간 입안에서 군침이 가득했다. 술 마실 기회가 없는 군대에서 막걸리가 눈앞에 있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물론 우리는 몇 번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농부는 한사코 물러나지 않고 권유했다. 저렇듯 애절하게 권하는데 매몰차게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소대원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권커니 잣거니 농부가 가져온 막걸리를 비워갔다. 그중에 내가 제일 문제아였다. 막걸리 맛에 빠진 나는 일은 내팽개치고 정신없이 들이켜다가 온통 취해 버렸다. 결국 일이 끝나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밭에 누워 잠을 자고 말았다. 그 당시 분대장이었던 나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었다. 부대 복귀 후 그 일이 대대장에게 알려져 심한 질타를 받았다. 그 벌로 나는 완전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30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 일은 부대 선·후임들과 가끔 술자리를 가질 때면 늘 안주처럼 회자된다.
결혼 후 한동안 아이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쓰이던 아내와 나는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운동을 권유했다. 이때 금연을 결심했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조기축구회를 나갔다. 우리 팀은 4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벽 6시부터 운동을 시작하는데, 이게 웬걸, 시합 중간이나 쉬는 시간에,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막걸리가 등장했다. 조기축구를 핑계로 모인 술꾼들은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한 잔 마시라고 계속 권했다.
처음에는 조기축구를 시작한 이유도 있고, 또 신입회원으로서 눈치도 보이고 해서 몇 번 사양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막걸리 향에 나는 어느덧 홀리듯 술꾼들 사이에 끼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조기축구회가 모이는 날이면 습관처럼 막걸리를 마셨다. 경기에 이긴 날에는 기뻐서, 경기에 진 날은 화나서 술잔을 돌렸다.
어느 날에는 축구 시합이 끝나고 점심 겸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까지 막걸릿집을 찾아다니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 이 때문에 조기축구회 나가는 일요일이면, 부부싸움이 잦았고 집사람 눈에는 살기가 넘쳐나곤 했다. 조기축구회를 빙자한 조기음주회는 몇 년 뒤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 당시 내가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 집사람은 지금까지 앙금이 남아 있다.
직장 관계로 전주에서 2년여 생활한 적이 있는데,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전주 막걸리 골목은 전국 애주가들의 성지다. 마시는 주전자 개수에 따라 안주의 종류와 가격이 달랐다. 막걸리 맛도 근사하고, 안주의 양과 질이 어마어마하다. 이 때문에 애주가가 아니라도 풍족하고 맛깔나는 안주 겸 반찬을 맛보러 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나는 수요일 저녁마다 전주 곳곳의 막걸릿집을 순례했다.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마시던 막걸리를 조금씩 음미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재료에 따라 막걸리 맛이 다르다는 사실도 비로소 깨달았다. 서서히 술에 젖어드는 황홀경을 가르쳐준 그때 그 골목의 막걸릿집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여러 막걸리 중에서 광산구 비아동에서 빚은 비아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하지만 슈퍼마켓이나 식당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무등산막걸리를 주로 마시는 편이고, 무등산막걸리 제조 공장에 가서 직접 사다 먹기도 한다. 비아막걸리와 무등산막걸리의 맛을 굳이 비교하자면, 비아막걸리는 첫맛이 시원하고 끝맛이 약간 고소하다. 무등산막걸리는 빈속에 목 넘김이 좋고 알딸딸하게 취하기에 적당하다. 특히 김치냉장고에다 보관하고 마시면 감칠맛이 그만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집에서 일할 때 막걸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집에서 갂운 함평 월야주조장에서 생막걸리를 도매로 살 수 있다. 다소 가격이 올랐지만 만 원에 큰 막걸리(1,700ml) 네 병, 작은 막걸리(750ml)한 1개를 사놓고, 여러 날 두고 먹는다. 농사일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증을 해소하는 데 막걸리만 한 것이 없다. 여름철 시원한 얼음을 둥둥 띄우고 마시면 더위와 노동의 노곤함이 훌쩍 달아난다.
막걸리 안주로는 홍어무침과 두부김치가 궁합이 잘 맞는다. 개인적으로는 곱창구이와 얼큰한 주꾸미볶음을 안주로 즐겨 먹는다. 술잔은 투박하고 오래된 양은 잔이 막걸리 분위기에 어울린다. 잔 가득 술을 채우고 손끝으로 살며시 막걸리가 묻어나게 잡고 마시면 금상첨화다.
집에서 차분히 글을 쓰려고 하는데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집 근처 무각사 주변을 산책하거나, 막걸리를 한잔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첫 책을 집필하면서 어둡고 긴 동굴을 헤매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곤 했는데, 이를 이겨내는 데 막걸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한잔 마시면 한결 읽기가 쉬워진다.
나는 술에 취하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주사가 있다. 또 기분이 한껏 고조되면서 말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가벼운 시비가 붙기도 했다. 친구들의 핀잔에도 술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내심 술에 취해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물론 오판이었다.
며칠 전 토요일 점심 무렵에 친구와 가벼운 약속 자리가 있었다. 간단히 한잔 마시자고 했는데,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결국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술에 취해서 비몽사몽 집에 왔는데 어떻게 걸어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렵사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고 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웬 할아버지가 나한테, “당신 누구요”고 대뜸 묻는다. 알고 보니 우리 집이 아니다. 아뿔싸, 층수를 헷갈렸다.
간신히 집을 찾아서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현관문 안쪽을 걸어 잠가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사람을 불러도 묵묵부답이다. 휴대폰도 받지 않는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니 그때서야 잠금장치를 풀어준다.
“지금 몇 시야, 당신 미쳤어? 전화도 안 받고, 허구한 날 내 속만 썩이고, 으이구 저 인간하고 못살아!”
아내는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고 매섭게 나를 몰아붙였다. 아내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보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필이면 그날이 장인어른 생신이었는데 술에 취해서 그걸 깜빡 잊어버렸다. 낮술에 취하면 부모님 얼굴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맞는 듯싶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틀림없다.
나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적어도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는 그 결심을 지키고 있다. 언제까지 지켜질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을 여의고 슬픔에 젖을 때, 저녁노을이 아름다워 시간을 멈추고 싶을 때, 고독이 짙어질 때, 직장생활에 회의감이 가득할 때,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낼 때, 내 곁에는 늘 막걸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시골길에서 처음 마시던 그 알싸하고 시큼한 막걸리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런 내가 막걸리와 매몰차게 결별할 수 있을까? 글을 마치고 나면 득달같이 일어나 막걸리 한 병 사러 가야겠다. 그래도 오늘은 마시지 않고, 일단 냉장고에 넣어놓을 거다. 세상사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유비무환. 막걸리 한 병쯤은 냉장고에 비축해놓아야 마음 든든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