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인간은 여기에 어떤 의지와 열망과 사랑의 환희 같은 심오한 조건을 덧붙인다. 그래야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위로한다. 오직 생존과 종족 번식의 본능만 지닌 미물은 삶의 가치가 없는 것일까? 하찮고 볼품없는 생명체도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며,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몇 달 전 시골에서 쌀을 가져왔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거실에 두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방바닥에 작고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하나둘씩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자세히 살펴보니 쌀벌레라고 불리는 바구미였다. 보이는 족족 아무 생각 없이 물티슈로 쓱 문질러 휴지통에 버리거나, 그것도 귀찮을 때는 손바닥으로 때려잡아서 싱크대에 버리곤 했다.
그날도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때마침 작은 바구미 한 마리가 지나가서 들고 있던 효자손으로 몇 차례 때렸다. 그런 다음 설거지를 하고 다시 왔는데,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한 번 효자손으로 탁탁 내려친 다음, 모서리로 확실하게 짓이겼다. 바구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완전히 죽은 듯 보였다. 이따가 휴지에 싸서 버려야지 생각하고, 냉장고에서 간식을 찾아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자리에서 또다시 뭔가가 움직였다. 진짜로 죽은 줄 알았던 바구미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탓인지,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 탓인지 모르겠지만, 바구미는 살금살금 아주 조심스레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효자손을 장난삼아 방바닥에 내리쳤다. 바구미가 걸음을 바로 멈추었다. 소리를 들었나? 진동을 느꼈나? 흠칫 놀라 잔뜩 오므린 모습을 보니, 감각적으로 아픔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순간, 이 녀석을 꼭 죽여야 할지 고민이 밀려들었다. 일단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다. 나는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비춰보았다. 자세히 보면 딱정벌레를 닮았다. 작지만 이외로 강인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 코처럼 기다란 주둥이는 끝이 뾰족하고, 등에는 우둘투둘 얽은 갑옷을 둘렀고, 날개도 있다. 여섯 개 다리는 미끄러운 물체 위에서도 잘 기어다니게끔 발끝이 가시처럼 날카롭다.
한동안 죽은 척 몸을 움추리던 바구미는 다시 발을 놀렸다. 주변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면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다가 어느 순간 어두운 곳을 찾아 숨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나름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듯하다. 아무리 뛰어봤자 거기서 거기인데…….
바구미는 사람에게는 해로운 곤충이다. 농부가 힘겹게 지은 쌀을 무전취식해서 좀먹는다. 한번 바구미가 낀 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녀석들은 쌀알을 먹어치우고, 또 쌀알 속에 구멍을 뚫어서 유충을 낳는다. 유충은 쌀을 녹여 먹으며 자라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다시 성충이 되어 쌀알을 뚫고 나온다. 이 과정에서 쌀은 잘게 부스러지고, 밥을 지어도 찰기가 사라진다. 바구미를 잡아내는 일은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쌀알보다 몸집이 작으니, 쌀을 얇게 펴 널어놓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바구미를 다 잡아내도 며칠 뒤에 다시 거무튀튀한 녀석들이 출몰했다. 쌀알 속 유충이 그사이 성충이 된 탓이다. 농부들에게,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바구미만큼 얄밉고 괘씸한 곤충이 또 있을까?
이처럼 사람에게 해로운 곤충이지만, 바구미는 바구미로 태어나 바구미로 살아갈 뿐이다. 어쩌다 보니 쌀가마니에서 빠져나왔고, 몸 숨길 곳 없는 환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이 들이닥쳤고, 절체절명 위험에 빠졌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이 꿈틀댄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바구미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다 포기하고 드러눕고 싶을까? 알 수 없는 폭력의 주범을 향해 분노와 울분을 쏟아내고 싶을까?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까? 어떤 경우라도 더는 소용없다. 바구미의 처지는 냉정한 나의 마음에 전혀 울림을 전하지 못한다. 바구미 한 마리 죽었다 한들 누구 하나 슬퍼하거나 위무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해프닝일 뿐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생명이 스러질 뿐이다.
나는 가벼이 일어나 휴지를 한 장 뽑았다. 그러고는 작은 바구미를 휴지에 싸서 집어 들었다. 그대로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어 짓이기면 끝이다. 하지만 나는 창문을 열고 휴지를 털어 바구미를 살려 보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나 바구미에 대한 연민이 나의 행위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좁은 방바닥에서 죽는 것보다 더 나을 듯싶었다. 바구미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살생을 하고 살았던가? 내 손으로 죽인 곤충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어린 시절 별다른 놀이가 없다보니 들녘에 나가서 무수히 곤충들을 죽였다. 고추잠자리 날개를 꺾고, 매미를 실에 매달고, 풍뎅이 다리를 몽땅 부러뜨리고, 개구리를 겨냥해 돌을 던지고, 귀뚜라미, 메뚜기, 사마귀, 개미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지극한 애도가 없는 유희였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주관한 냉혈한이면서도 집에서 키우던 개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리자 무슨 청승인지 밤새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