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소설 독자 되기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읽고

by 김태경

잘 만든 드라마나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나도 저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 몸짓과 화면의 구도, 색감 등 화면을 구성하는 장치들은 모두 이야기 전달 도구가 된다. 음악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더 입체적으로 변신한다.

반면 소설은 글자뿐이다. 규격화된 종이와 글자폰트, 크기로만 이야기가 전해된다. 독자는 글자를 눈으로 먹어 머릿속에서 드라마를 만든다. 영화나 드라마의 관객 보다 소설의 독자가 더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드라마의 1부, 영화 도입부의 임팩트는 더 볼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상상하기로 작정한 독자들이라 좀 더 많은 페이지를 인내할 가능성은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단 5페이지 만에 소설의 배경, 상황, 분위기가 머릿속에 재현되고, J.M,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역시 4~5지 만에 꼬마 제제와 또또까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들 뿐 아니라 모두가 활자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글자로부터 출발하는 내 두뇌의 새로운 창작활동 때문이다.


단편소설 역시 짧게는 10페이지 미만, 길게는 30페이지에 글자로 세계를 만들어 놓는다. 총량이 적다 보니 도입부 역시 적다. 나는 독자로서 장편보다 단편에 늘 놀라움을 느낀다. 얼마 전에 읽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 <달려다, 아비>가 그랬다. 총 9편의 이야기가 234페이지로 묶여있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 중에서 두 번째 이야기 [달려라, 아비]는 이 작가가 봉준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못지않은 신 세계관 연출가라는 생각에 확신을 안겨 주었다.

(이하에 스포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예상하지 못했던 도입부였다)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중략)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방에서 혼자 낳았다. (중략)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 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책 속에서)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나온 '나'가 주인공이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중략) 지금 막 후쿠오카를 지나고 보르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 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백십 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책 속에서)


낭만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해학적이지도 않게 달리는 아버지를 묘사한 글들에 먹먹함이 실려 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집에 없는 것을 주인공은 바쁘게 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는 없이 뛰느라 집에 못 오고 있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는 공동의 작업이지만 소설은 오로지 혼자만의 작업이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쳤을까. 인간적이면서 현실적인, 감동적이면서 가슴 깊이 다가오는 소설에 '상상력'이나 '창의력'이라는 단어는 옹색하다.


누구나 매일 혼자 머릿속에서 하는 상상, 비밀이 있다.

머릿속에서 꺼내어 글로 표현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소설가, 작가이다. 보편적인 일상 속의 특별한 사건에 메시지를 담고 보이지 않는 감정과 부재, 결핍을 표현하고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활자가 되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선물이다. 그 책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 다시 누군가의 눈과 머리, 마음을 거치는 것은 인류의 가장 고전적인 블루투스 기법일 것이다.

유튜브 숏폼, 인별그램 속 남의 모습 그만 보고 내 두뇌가 보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야기 책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나는 요즘 이 일이 참 재미있다.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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