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새롭게 들리는 노래 가사들..나만 이런가요?

by 김태경

♪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 해요 허면 그대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


1989년 가수 변진섭이 부른 '숙녀에게'라는 노래 가사다. 미지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맑은 미소를 가진 그녀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가끔씩 우울한 표정을 내비치는 연인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 꿈속에라도 찾아가서 무슨 일인 건지 알고 싶다는 내용이다. 시 같은 가사와 상냥한 멜로디의 이 노래는 사랑을 떠올리는 미소뿐 아니라 가요톱텐을 보던 어릴 적 시절을 떠 올려주는 추억의 노래이기도 하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무심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를 들었다. 별 일도 없었는데 그날 따라 이 노래가 사랑 노래로 들리지 않고 육아 노래로 들렸다. 노래 부르는 이는 사랑에 빠진 남성이 아니라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였다.

'아들아 요즘 학교에서는 별일 없니? 친구들과는 요즘 뭘 하면서 놀고 있니? 엄마가 참 궁금한데 도통 말을 안 하니 네 잠든 밤 꿈속에라도 찾아가서 듣고 오고 싶은 심정이구나..'


♩그대여 지금껏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 주고 어느새 거칠은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했던 무심한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이 못난 날 만나 얼마나 맘고생 많았는지 그 고왔던 얼굴이 많이도 변했어요.

내 맘이 아파요


이 노래는 김건모가 부른 '미안해요'다. 자기 때문에 고생한 여인(노래하는 이가 남성이니 여인으로 하겠다) 에게 헌사를 전하는 노래. 절절한 김건모의 목소리가 서정적인 멜로디와 만나니 명곡이 된다. 근데 이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또 어느 날 우연히 들었는데, 고단한 시절 다 보내고 다 늙고 병든 노인이 부르는 노래라 상상돼서 화가 난다.

'이런 X 놈의 자식이 있나. 남의 집 귀한 딸을 개고생 시키는 완전 나쁜 놈이구나 옷 한 벌을 못 사줬다는 건 안 사준 거나 마찬가지이고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는 건 뭐.. 말 다했지!'


♩난 왜 이리 바보인지 어리석은 지 모진 세상이란 걸 아직 모르는지 터지는 울음 임술 물어 삼키며 내려하지 하고 일어설 때 저 멀리 가까워 오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도 없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댈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만 흘러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패닉의 '정류장'이라는 노래 가사다. 분명 어렸을 때는 내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만을 기다리는 내 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들었던 노래였는데 이제는 내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아빠. 내 속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해내야 하는 무수한 일들 속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안아주는 존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까닭인 듯하다.


참 희한한 일이다.

노래를 음미하며 나를 투영해 감성에 젖었던 낭만은 온데간데없고 현실만 남았다.

T와 F의 문제일까? 글쎄..

현실적이 된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삶을 살아나갈수록, 생애 경험을 하면 할수록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손실이나 미움받기가 나름 귀한 교훈을 남겨 준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건 인생의 자산 아닐까.

사는 게 그렇지 않나. 돈 벌어야 하고, 때론 누군가에게 야박하게 굴어야 하고, 싫은 소리도 참고, 화를 삭이기도 하고.. 그게 못나거나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인생이 마냥 봄날 같지만은 않다는 걸 체험했기 때문이니까.

어쩌면 인생이 그런 거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낭만적인 상태가 아닐까 싶다.


최백호 선생님의 노래가 생각난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을 잃은 건지 낭만이 진화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40대 중반의 중년이 이렇다면, 노년이 되어 선보일 낭만은 어떤 걸까? 새해를 앞두고 낭만 젖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마음을 다져봐야겠다.


우연히 귀에 들어오는 노래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여보자.

희한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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