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에 신호등을 설치해 주세요.
우리 집 인근에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이다.
29층짜리 아파트가 올라가기 전, 땅과 땅 속을 다듬는 사이 구옥이 가득했던 곳은 황야가 되었다. 덕분에 고개를 이리저리 빼지 않아도 저 멀찌감치 까지 훤히 보인다. 시골 풍경을 집 근처에서 보는 것 같아 마음까지 뻥 뚫리는 느낌이다. 땅 다지기 작업이 거진 끝났는지 얼마 전부터는 공사지역의 경계 가림막이 더 높게 쳐졌다. 가림벽에는 형형색색 나름 멋지게 디자인된 시트지가 붙어 있긴 하지만 곧 엄청난 공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엄중한 예고를 하는 듯하다.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되는 이 동네에는 1개 초등학교와 2개 중학교, 1개 고등학교의 통학로를 끼고 있다. 초등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공사장 게이트는 채 500미터가 안된다. 때문에 학부모들은 공사로 야기될 분진가루, 통학로 안전 등을 염려하여 학교와 함께 시공사, 구청, 교육청에 아이들 안전 대책을 요구해 왔고, 요구가 반영된 최선의 상황임을 상호 수용하여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학부모들은 여기저기서 공사장을 주시하며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런 일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다. 내 속 우려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용감한 누군가에게 박수 표시의 이모티콘이나 반응을 남기는 정도에 불과하다.
퇴근을 빨리 한 어느 날, 새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둘째 아이를 마중 나갔다. 1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지만 2차선 도로를 한번 건너야 했다. 신호등이 있으니 알아서 잘 건너겠지 싶었는데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공사장 게이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신호수'라고 불리는 안전통제인력이 있긴 했지만 사거리인 데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몸을 틀면 바로 공사장 입구가 되는 상황이었다. 건설사 측에서도 우려가 되었는지 게이트 양 쪽 끝으로 보행 도로에 차단기까지 설치를 해 두었다. 근데 하필 내가 아이를 마중 나가던 그날 게이트에서 덤프트럭이 나오는데 신호수가 트럭 왼편에 서 있는 바람에 트럭 오른편에서 오는 초등학생 아이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길을 다니면서 휴대폰을 하는 탓에 고개를 숙이며 걷고 있었고 보행로에 위치한 차단기도 올려져 있어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나는 정면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걸어오고 덤프트럭은 나오는데 신호수는 트럭 앞에 서 있지 않고 좌측에 서 있다. '어 어' 하고 있는데 다행히 트럭 운전수가 아이를 발견했고 멈춰 섰다. 아이는 트럭 앞을 지나 신호수를 거쳐 지나갔다.
그 장면을 보는데 덜컥 겁이 났다. 내 아이들이 매일 학원 다니는 길이고, 저 보행로로 가야 차도를 가장 덜 건너는데 저렇게 커다란 덤프트럭이 수시로 드나들 뿐 아니라 신호수의 안전 통제가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어느 길로 다니게 해야 하나 남편과 생각하다가 문제의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횡단보도에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구청에 '신호등 설치를 검토해 주세요'라는 글을 작성했다. 네이버 지도를 캡처해서 횡단보도들의 위치, 공사장 게이트 입구, 신호등이 있으면 좋을 만한 곳을 표시해서 첨부했다.
신호등이 정말로 설치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내 일, 내 아이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어디 아이 키우는 일뿐이겠나. 저 사람의 일이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조화로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
주변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 위험을 모른척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와 내 아이를 보며 모른척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