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튤립 구근의 물밑작업

인생은 물밑작업의 여정

by 김태경
화면 캡처 2025-12-20 193250.jpg

함께 일하는 이가 하나 건네주었다. 사무실에서 같이 키워 보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튤립 구근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그 예쁜 튤립?? 토란 같고 커다란 마늘 같이 생긴 저것이 튤립이라고? 식물계에도 미운 오래 새끼가 있구나 싶었다.

물에 담가 두면 된다고, 그럼 뿌리나고 자라는 걸 볼 수 있다며 플라스틱 컵에 물을 넣고 구근을 담가 놓기로 했다. 구근(球根)은 알뿌리라고도 하는데 알뿌리는 자기를 기준으로 아래로는 수직으로 뻗고, 위로는 곧은 줄기를 밀어낸다. 이게 정말 튤립이란 말이지..

20251219_084853.jpg

며칠이나 지났을까. 보름? 물과 햇빛을 만난 튤립 구근은 위로 아래로 뻗기 시작했다.

모든 식물들이 위로, 아래로 열일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플라스틱 컵에 두고 보니 구근의 열심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구근은 흰 수염 같은 튼튼한 뿌리를 힘차게 내뻗었고 그 덕에 줄기는 곧고도 바른 모양으로 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초록색 잎사귀로 풍성해져 갔다.


구근을 땅에 심어두었다면 보지 못했을 뿌리가 새삼스럽게 뭉클했다. 정확히 말하면 안쓰럽다고 할까.

모든 생물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열매 내놓기에 온 힘을 쏟는다. 호수 위를 유유히 다니는 오리도 물밑으로는 두 발을 무진장 앞뒤로 차는 중이며, 굵은 기둥과 풍성한 잎을 가진 나무 역시 어두컴컴한 땅속에서 다른 뿌리들을 피해 더 넓고 깊게 영역을 넓혀 나가지 않나.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다.

소중한 생명을 몸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모체는 10개월을 희생하고, 출세까지도 필요 없다, 그저 일자리 하나 얻기 위해 젊은이들은 자격증을 따고 또 딴다. 아름답고 예쁘기만 한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의 평생소원은 배불리 한 끼 먹는 것이라고 하니 눈에 보이는 모습을 갖기까지, 일자리 하나 얻고 새 가정을 꾸리고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남들 모르는 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수하다. 나는 다음 주 회의에서 발표할 내년도 사업 전략을 위해 몇 날 며칠 읽고 찾고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고 앉아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머릿속이 쉬지를 않는다. 물밑작업.. 그래 사실 인생 여정은 물밑작업의 연속이지..


튤립 구근은 예쁜 꽃을 맺는다. 구근이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내기까지는 몇 달이 채 안 걸린다.

사람 구근은 튤립의 삶보다는 약간 더 복잡하고 길다. 햇볕과 물만으로는 부족하며, 시간도 튤립에 비하면 까마득하다. 자리 잡고 열매 내는 시간이 짧든 길든, 튤립도 나도 구근으로써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건 매한가지 삶의 순리이자 이 세계 질서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열일을 거듭하면 언젠가는 더 길고 단단한 뿌리가 자라 있을 것이고, 어떤 모양이든 구근의 진가를 알아줄 열매가 맺히겠지. 이 뿌리와 열매가 아름답게 피었다가 우아하게 역시 아름답게 시들기를 바란다. 어쩌면 튤립을 포함한 많은 식물들이 피고 지는 것을 보는 건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삶에 대한 힌트일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오늘도 한 뿌리 좀 더 길게 내기 위해 물밑작업을 하러 나간다.

잊지 말자. 물밑작업의 하루하루 일상들은 반드시 열매를 낸다는 것을.

keyword
이전 03화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