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을 보고
저 하늘의 태양은 언제나 나를 비추고 있지만, 태양이 부담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없으면 서늘하고, 있으면 따뜻하고, 어쩔 땐 너무 뜨거워 도망 다니긴 하지만 그게 다다. 태양이 나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공평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쉼 없이 나를 비추면서도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어느 날 태양이 내게 말을 걸며, '난 이제 너만 비출 거야. 너의 모든 걸 함께 하며 너를 지켜볼 거야.."라고 말한다면 태양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달라질까?
영화 <장손>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이다.
판사가 되라며 아들을 법대로 떠밀었던 영화 속 할아버지(승필)는 내 할아버지와 똑같다. 큰 아들,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 이도 저도 되지 못한 채 보잘것없는 사회 구성원이 된 영화 속 아버지(태구)의 모습도 내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가문의 족보나 차례 상 홍동백서에는 무감각한, 어른이니까 때때마다 찾아와 억지로 인사드리는 영화 속 손자(성진)의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느꼈던 가까운 듯 먼 것 같았던 내 감정이 되살아난다. 영화 속 성진의 고모들을 보면서는 아들이 우선인 부모 슬하에서 자란 엄마, 이모, 고모들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영화는 가업, 족보, 장손, 49재와 같은 고리적 말들을 사용하며 2시간을 채운다. 대구 저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인데도 그 뉘앙스와 느낌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영화 속 장손들이 가지는 무게감이 마치 내 어깨에 얹힌 양 실감된다.
사실 가족만큼 불편한 존재도 없다.
나 하나 건사하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데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보살펴야 한다. 기꺼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식에게 하는 것만큼 되지 않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나 싶다. 근데 또 가장 편하게 즉, 막 대하며 내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도 그들이다. 누가 뭐랄 건가. 언젠가 이 날이 부끄러울지언정 날 버리지도 떠나지도 못할 엄마, 아빠, 형제, 자매는 세상 만만하고 필요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가족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은 사뭇 다르다. 주로 아빠는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큰 아들은 '넌 장손이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집안 대소사를 다루게 된다. 맏딸도 크게 다르지 않다. 2녀 중 장녀인 나는 점점 나이 들면서 부모님에 대한 잔소리가 줄어든다. 투덜대며 잔소리하는 동생과 다르게 그냥 놔두고 엄마 아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말하곤 한다. 돈도 더 챙겨 드리고, 고모 생일이나 사촌들 결혼식이면 엄마 아빠 축의금에 보태라고 봉투를 더 건네주기도 한다. 부모님 병원 진료 보러 가는 건 당연히 내 몫이라 생각하며 간다. 내가 잘 벌거나 잘나서가 아니다. 부모님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다정한 딸도 아니다. 그저 나는 큰딸이니까.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속 어딘가 심겨 있나 보다.
이 영화 <장손>은 부모 세대가 틀렸다며 장손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젊은 세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극적인 화해 장면도 없으며, 할아버지가 손주를 놓아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는 손주가 요구하지도 않았던, 모두가 탐내는 쌈짓돈을 검은 봉지에 담아 아무도 몰래 장손에게 건네주며 '이제 우리 집 곳간의 주인은 너다'라고 암묵적으로 말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장손은 창문을 뚫고 비추는 태양의 장렬한 햇빛마저 부담스러운 짐으로 여겨진다.
모두가 탐내는 재물을 몰래 장손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내게 건네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우연히 들어버린 것도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할아버지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 가난 통에 혼자 살아남은 할아버지의 슬픔과 외로움이 담긴 가업, 이 악 물고 지키고 일궈온 이 집안.. 몰랐으면 몰랐지 할아버지를 비극의 현대사를 거친 한 인간으로 보는 순간, 어쩌면 장손은 냉정함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참.. 내 모든 걸 알아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정작 나는 내 가족들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이기심 때문인 걸까?
아무튼 이 영화 <장손>은 관객들이 사는 지역, 가족 분위기, 모습도 다 다를지라도 한국인이라면 100% 공감하고도 남을 영화이다.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장면없이, 길고 거창한 대사 없이도 우리 사회의 세대 간 인식 간극이 얼마나 큰 지, 가족 내에 있는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부분들을 폭로하며 이 사회를, 현실을, 내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건 세련되고 진중한 스토리와 연출 덕이다. 분명 일상에서는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데 이 유교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가장 친밀하고 사적인 집단인 가족 안에 엉켜 있다는 영화의 스토리가 영화의 관객층을 넓히고 감상평을 다채롭게 하는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니 궁금한 점이 생기네..
이재용, 최태원 회장님도 영화 <장손> 속 성진처럼 가업을 잇고 가문의 장손으로 사는 걸 부담스러운 짐처럼 여겼을까..?
오랜만에 웰메이드 우리나라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