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2026년 미국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 크리틱스 초이스 등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휩쓸고 있다. 말이 필요 없이 믿고 보는 두 배우 숀펜과 베네치오 델토로가 나오고 나의 영원한 로미오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것만으로도 안 볼 이유가 없는데, 박평식 선생님께서 무려 8점을 준 영화라니.. 엄청난 칭찬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졌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낯설어도 한참 낯선 영화, 그리고 미국
단일 민족 국가, 정 넘치는 동방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적잖이 충격적인 영화였다. 뉴스를 통해 미국인의 일자리를 뺏으며 미국인의 이익을 좀먹는다며 불법 이민자들에게 총을 겨누고 수갑을 채우는 미국 군인들을 본 적이 있다. '불법'이라는 것만으로도 총구를 겨누어 마땅하다 한다면 별 수 없으나, 가장 잘 살고 가장 힘센 나라가 가장 무서운 나라라는 사실이 오싹하다. 총기 소지가 가능한 곳에 분노가 가득한 사람들이 극과 극을 치닫는 이념의 차이를 보고 들으며 살고 있다. 슈퍼맨과 쥐라기공원, 디즈니왕국을 만들었던 그 옛날 할리우드 영화는 이제 복잡하고 혼란한 미국의 심경을 스크린으로 옮긴 듯하다. 영화적 상상력으로 과장이 더해졌겠으나 러닝 타임 3시간 가까운 이 영화를 보며, 그리고 온갖 좋은 상들은 다 주고 있는 걸로 봐서 내심 생각 든다. "미국 사람들이 생각이 복잡한가 보네.."
언제든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는 게 인간, 그러니 혁명도 사랑도 온전할 수 없는..
영화 속에서 퍼피디아(테아냐 테일러)의 등장 씬은 강렬하다.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한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걸 다 씹어 먹고도 남을 듯 엄청나다. 물불, 앞뒤 안 가리며 신념을 따르는 거침없는 혁명가인 듯했지만 록조 소장에게 하는 요상한 행동을 시작으로 그녀의 혁명 행동은 대의를 의심받는다(관객인 나로부터). 특이한 성적 취향과 지나치게 자기애적인 이 캐릭터는 '혁명가'에 대한 기분 나쁜 이미지만을 전달 한 채 사라진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 동지를 배신한 변절자.. 반정부 무장단체의 행동대장이었던 그녀는 비굴하게 숨어 사는 신세가 되고 그녀에게 버림받은 남자는 술과 약에 찌든 채 허송세월을 보낸다.
일제 식민지 치하 독립운동을 그렸던 한 영화에서 친일로 변절한 한 사람이 최후를 앞두고 이런 말을 한다. "독립이 될 줄 몰랐어"
이 영화는 신념을 따르는 모든 행동이 변절될 수 있음을 말한다. 혁명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랬고, 혁명가를 잡아 죽이겠다며 뛰어든 록조 소령은 기이한 성적 취향 탓에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나. 그 누구도 정의롭지 못하다, 그 누구도 온전히 옳을 수 없다.
찌질한 아빠, 변절자가 된 혁명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스꽝스러운 백인우월주의자. 잘 만든 블랙 코미디
이 영화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윌라의 아빠 밥(레오)은 극좌 무장단체 프렌치 75에서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지만 영화 내내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다른 이에게 전화기 충천을 하게 제발 도와달라는 것, 제발 집결지를 알려달라며 온갖 유치한 말로 징징거리며 전화 통화 하는 정도가 다다. 실제로 그는 영화 도입부 말고는 그 누구도 제 손으로 직접 구해내지 못한다.
퍼피디아 역시 그렇다. 신념을 따라 살겠다며 자기가 갓 낳은 아기까지 버리고 나왔으면서 감옥에 가야 한다는 얘기에 동료들의 이름을 넘기고 잠적한다. 동지를 위해, 대의를 위해 총을 대신 맞을 줄 알았지 이럴 줄은 몰랐다. 결국 신념은 공동체, 인류애가 아닌 자기애(自己愛)가 목적이었다.
세상 강렬한 모습의 록조 대령(숀펜)도 마찬가지다.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데 겉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균형도 잡히지 않은 상당히 비대칭적 걸음걸이, 개그콘서트에도 안 나올 법한 머리스타일, 곧 슬랩스틱이라도 할 것 같은 몸가짐은 그가 콤플렉스 덩어리라는 걸 증명한다.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수신제가, 자고로 수신제가해야 치국평천하하는 법!!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미스터리 범죄 로드 무비처럼 느껴진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신념변태자들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혁명이 뭐 따로 있나. 매일 같이 묵묵히 자기 자식 돌보는 게 혁명이고, 남편과 아내 서로 비위 맞추며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을 일상이 되게 하는 혁명은 루틴을 통해 내공으로 빛을 발한다. 혁명은 없어지고 풍자와 코미디가 넘치는 출생의 비밀을 지닌 부녀간의 상봉 이야기로 채워지는 영화 후반부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자기애를 버리고 가족을 위해 밥벌이를 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춘기 딸과 아빠가 잘 지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극찬을 받는 이유는 뭘까?
미국인들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어서일까?
찌질한 연기를 엄청나게 잘 해낸 영원한 로미오 디카프리오 때문일까?
MAGA로 피로도가 높은 미국인들에게 록조 혹은 세르지오(베네치오 델토로)로 표현된 미국 사회 속 많은 희한한 인물 때문일까?
이런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다니.. 참으로 웃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