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아오메이의 <교활한 아버지>를 읽고
한, 중 걸작 단편선(자음과 모음)에 엮여 있는 중국 소설가 야오어메이의 <교활한 아버지>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나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아버지는 작은 공장의 경비 일을 못해먹겠다고 그만둔 후 두 아들에게 부양비를 부담하라고 했다. 두 아들은 매달 시간 맞춰 아버지의 통장으로 돈을 보냈고, 아버지는 시간 맞춰 돈을 찾았다. 아버지와 두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통장을 통한 정기적인 거래만 했을 뿐 만나고 살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아들을 집으로 부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가끔은 고기도 먹고 옷도 사야 한다며 부양비를 올려달라고 말했다. 어느 날 큰 아들의 생일날 아버지는 생일카드를 보내왔고 전화를 해 왔다. 동사무소 직원이 혼자 사는 자신에게 기초생활 보장혜택을 받게 해 주어 보조금도 받고 식료품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아버지는 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 사람들도 좋은 정책은 좋은 아들보다 낫다고 하더라"
노년에 운이 틔었다는 아버지는 동사무소의 지원으로 넓은 집으로 옮겼고, 젊은 여자친구도 만났다. 둘째 아들이 이혼하면서 살집이 없어지자 큰 아들은 아버지와 동생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아버지 집에 동생이 살도록 주선했지만 아버지와 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큰 아들에게 서로를 고발해 댔다.
"너까지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구나. 내가 걔한테 빚졌니? 나는 공부시키고 결혼시켰다. 해야 할 일은 진즉에 다 했다고. 걔를 또 도와줄 의무가 없단 말이다."
"누가 그런 아들을 낳으라고 했나요? 그리고 아들이 힘들 때 아버지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요? 또 둘째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조석으로 아버지를 챙길 수 있지요. 적어도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물이라도 떠 드릴 수 있다고요."
이 소설 <교활한 아버지>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젊은 시절 늘 여자 문제를 일으켰고, 엄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이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클 때까지 먹이고 공부시키고 재워주었으니 내 생활비를 대라고 요구했다. 아들들에게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고, 다 큰 자식이 곤경에 처한 것은 이제 스스로 해결할 일이라고도 했다. 노년에 젊은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 아빠는 심지어 아들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너희가 한통속이라는 것도 알고 부담이 늘어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직 젊어서 내 덕을 보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내가 그 사람 덕을 봐야지."
반면 아들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면서도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을 동시에 했다. 그나마 큰 아들은 큰 아들이라며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싫은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작은 아들은 아니었다. 사이가 좋지 않던 아내와 이혼하고 살 곳이 없어진 작은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빌붙었지만 아버지를 너무나도 미워하며 소설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모든 순간에서 계산을 한다. 나에게 이득이 되는 건가, 이득은 충분한 건가, 내가 이렇게 보여도 되는 건가 와 같은 생각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삶의 어려운 지점은, 아니 사람의 본능이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은 언제나 저 계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전개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다. 또한 그 상대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상대방의 자리에 두지 말아야 할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식이 부모를 내 이득의 계산식 상대로 두는 경우 같이 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 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않았으면서 자식에게 자식의 도리를 요구한다면 자식이 마주해야 갈등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할 것이다. '교활한 아버지'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마치 금단의 것처럼 다가오지만, 특히 유교의 발원지인 중국 소설 제목이라는 것이 놀랍지만 소설 속 두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냉대와 비아냥을 읽고 나니 사이다처럼 통쾌한, 이보다 더 들어맞는 제목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교활한 아버지는 죽음에 가까워서야 둘째 아들에게 집을 내주었고, 아들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들의 대화는 여전했다.
"우리가 불효자라는 욕을 듣게 하고 싶었던 거죠!"
"넌 횡재했지. 병만 아니었으면 절대 너에게 집을 주지 않을 거니까."
불완전한 인간들이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다. 부모라고 자식보다 모두 나은 사람일리 없고, 부모라고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교활한 아버지가 키운 자식이 모두 교활한 인간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교활하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모두 교활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자식이 우리 아버지는 교활하다고 느낀다면, 자식은 감당해야 할 도리는 어디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