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생활 6년 차. 우여곡절 속에 일본 대학에서 졸업을 하고 학생 비자가 2주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친구 아버지의 소개로 나고야의 상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대만에서 귀국하자마자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난 또다시 동경에서 나고야로 홀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일본은 출퇴근 거리가 편도 2시간 이상이 되면 회사에서 교통비 및 기숙사를 지급해야 하는 근로기준법이 있다.
난 동경에서 나고야로 이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나고야의 회사에서 기숙사를 제공한 상황이었다. 기숙사로 표현하긴 했지만 빌라나 아파트를 회사에서 임대하여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4월 입사이긴 했는데 급작스러운 입사로 여자 직원들이 거주하는 원룸에는 빈 방이 없어 4인 가족이 거주하는 24평짜리 아파트에 임시로 거주하기로 하고 큰 가전은 택배로 보내고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낯선 나고야로 떠났다.
우리 회사는 안도 산업이라는 중소기업이었다. 건축 자재를 수출입하면서 한국, 중국과의 거래를 하는 곳이었다. 15명 내외의 직원이 있었고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추후 중국인 직원을 채용했다. 우리 회사는 한국과 중국의 거래처가 있었고, 나를 소개한 내 친구 아버지의 회사는 우리 회사의 VIP거래처였다. 나를 채용한 것도 타이밍 맞게 기존 한국 직원이 귀국하는 상황이라 내 자리가 생겼던 것이었다.
우리 팀은 해외 영업팀. 4월에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남자 4명 여자 2명, 중국인 한 명과 나였다.
“고이즈미 아들이 배우로 나왔다던데 알고 있나? 그 친구 학교 자퇴하고 드라마 나오던데 봤나?”
사장님은 매일 아침마다 해외 영업팀을 불러 경제, 사회 뉴스 내용을 묻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5시에 일어나서 뉴스를 듣고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2006년 당시 일본 사회는 학교생활 때와는 너무 다르게 보수적이어서 여직원들은 일괄적으로 같은 치마 정장의 유니폼을 입어야 했고, 핸드폰도 개인 사물함에 넣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문을 열고 서서 ‘오하요 고자이마스’ 아침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근무를 시작했다. 핸드폰까지 사물함에 넣고 근무하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일본 직장에서의 월급이란, 근무 시간 동안 개인 업무를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 컴퓨터도 없다. 설계팀을 제외하고는 몇 대의 컴퓨터로 공용으로 사용했다. 사실 개인 컴퓨터로 계속 일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으니,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맞은 일이긴 하다.
난 한국의 거래처와의 소통과 수출입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해외 영업팀이다 보니 한국과 중국 출장이 한 달에 한 번은 있었다. 추후 채용된 중국 직원과 입사 동기들과 회사의 지원으로 퇴근 후 반 강제적 영어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외국인이라서 특별히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장님은 우리보다는 남자 동기 친구들이 무슨 일이든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처럼 경쟁 사회가 아니라서 인지 동기들은 나와 중국인 친구가 더 잘한다며 본인들이 조연을 도맡아 했었다. 출장 준비로 프레젠테이션 할 때에도 나와 중국인 친구가 주가 되어 진행하였고, 동기들은 한발 물러서서 자료 수집만 도와주는 상황이었다. 동기들은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주의였다. 덕분에 일본어 실력뿐만 아니라, 업무 능력도 빠르게 성장했다.
회사의 넘버 투 사쿠라이 총괄 상무님이 해외영업팀을 담당하고 있어 일본 내의 해외 출장도 함께 할 때가 많았다. 전임 한국 친구가 일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도 잘 이해하지 못해 상무님이 함께 일하는데 많은 고충이 있었다고 했다. 반면 나와는 손발이 척척 잘 맞았고, 유머 코드도 잘 맞아서 4년 정도 중국으로 한국으로 다니며 비즈니스를 여러 건 성공시켰다. 사쿠라이 상무님은 키가 작았지만 이목구비가 중에 뚜렷하고 잘생긴 가가멜 같은 느낌의 호탕한 웃음이 매력적인 분이었다. 한번 사는 인생, 많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마술까지 배운 재미있는 분이다. 한국 출장 가기 전에 출장 준비는 내가 다했고, 사쿠라이 상무님은 마술 연습에 몰두하셨다. 한국 출장 때마다 꼭 들리는 워커힐 호텔의 ‘카지노’와 ‘명월관’에 가서 음주와 마술을 마음껏 펼쳤다. 어찌 보면 사쿠라이 상의 개인 비서처럼 많은 업무를 수행했지만, 나는 유쾌한 사쿠라이 상이 싫지 않았다. 일본 직원에게는 엄격한 분이었지만, 나와는 케미가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안도 산업의 사장님의 성이었다. 사장님은 나고야에서 다섯 번째로 부를 축척한 사람이다. 나고야 공항 설립 시에 투자도 많이 하신 분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신 분이었지만, 개인 삶을 보자면 불운한 사람이다. 일본 무용을 전공한 첫 번째 부인과 남매가 있었지만, 부인은 암으로 사별하고, 자식 둘도 한 명은 지병으로, 한 명은 자살로 혼자가 되었다. 사장님 나이 60세였다. 남편에게 자식이라도 남겨두고 싶어 했던 터라, 본인의 제자를 소개하여 유언으로 재혼을 부탁하기도 했다. 30세 넘게 차이나는 젊은 부인과 재혼을 하여 60세에 첫째 아들, 62세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내가 입사를 한 것이다.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출산한 이야기는 사장님에게는 자만 그 자체였다. 젊은 사모님은 어려운 친정집을 살렸고, 하와이에 있는 별장을 1년에 6개월 정도 거주하며 사장님의 많은 돈을 마음껏 썼다. 2층 집에서 사장님은 1층, 사모님과 아이들은 2층에서 살면서 한집에서 식사도 따로 하며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사장님의 많은 돈이 쇼윈도 가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장님은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일본에는 ‘캬바쿠라’라는 곳이 있다. 프랑스어인 ‘카바레’와 영어인 ‘클럽’의 합성어로 여성 종업원이 옆에 앉아서 술을 따라 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술집이다. 성적인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며 터치도 없는 곳이다. 사장님은 외로움을 자주 이곳에서 달래곤 했다. 단골 고객이니 쿠폰도 많이 받았다. 받은 쿠폰을 남자 직원들에게 즐기라며 나눠주곤 했다. 그리고 일본의 회식 문화도 적잖은 문화 충격과 신기한 경험을 했었다. 평상시 조용했던 동기들이나 타 부서의 팀장들도 알코올이 섞이니 엉덩이 사이에 나무젓가락을 꽂고 부러뜨리기도 하고 사장님이 남 직원들을 향해 찐하고 야한 농담을 많이 했었다. 특정 부위의 크기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바지를 내리기도 했다. 일본 문화라고 하면서 팀장 몇 명과 외국인 2명인 우리를 데리고 꼭 언니들 있는 술집으로 2차도 데리고 갔었다. 사장님은 우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언니들의 가슴을 마음껏 터치하며 허허허 웃으셨다. 가슴 아래로는 터치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민망해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와 예능인들의 말과 행동에 수위가 너무 높아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방송으로 내보는 곳이니, 사장님의 이런 행동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내가 안절부절못했던 것은 사장이란 직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같으면 다음 날 민망해서 얼굴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여긴 다음 날이 되면 너무나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절친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난 4년 동안 이런 희한한 술 문화를 보고 접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 나는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