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예술 사진

by 서광

일본 대학에서 엔화로 15만 엔 정도 생활비와 학비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교환 유학생 들은 부산대, 경기대학교 20대 초반의 중문과 학생들로 능숙하게 중국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었다. 일본에서 파견된 나에게 관심은 많은 듯 보였으나, 난 일본 대학에서 파견된 겉모습마저 일본인 같은 얼굴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친구들과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유럽 친구들과는 중국어를 사용하며 친하게 지냈다. 전공과목 공부로 고생하는 나에게 주말은 참 행복하게 보냈다. 평일을 열심히 산 나에게 작은 보상을 주고 싶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속눈썹 붙이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에스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각국의 친구들하고 대만 클럽에 갔다. 일본인 나의 어린 친구는 중견 기업 대표의 귀한 딸로 온실 속에 화초처럼 자란 친구였다. 대만 유학이 결정되던 날 친구 부모님께서 중국어 전자사전을 사가지고 와서 나에게 잘 부탁을 한다는 인사도 했다. 귀한 딸을 낯선 세상에 보내니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난 그 친구에게 경험이라는 이유는 거침없이 도전하게 했다. 귀도 뚫고, 클럽도 가고,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게 했다. 처음이라는 두려움을 깨고 성취감을 주고 싶었다. 그 친구에겐 (치아키) 내가 사회의 첫 번째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클럽과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곳은 부킹은 없었다. 커다란 바에서 음료를 결제한 후, 스탠딩 테이블 주위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교내의 친하게 지난던 대만 학생들과도 자주 클럽 갔다. 유럽 친구들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부럽기도 했다. 하얀 피부에 파란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얇지만 섹시한 입술이 조명에 비쳐서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대만 학생들이 그녀들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자연스러운 동서양의 찐한 스킨십을 종종 목격했다. 매주 텔레비전에서 볼만한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동서양의 친구들은 자주 보여줬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것도 익숙해졌고, 이 또한 재미있고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유학 생활 동안, 이 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들을 참 많이 했다. 그중 하나는 당시 유행했던 ‘예술 사진’이다. 예술 사진이라고 하니 에로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귀여움, 섹시, 시크, 전통, 커플 사진 등의 스튜디오에서 콘셉트에 따라 앨범으로 만드는 다. 것이다. 유행은 따라야 하기에 친구들과 2만 엔 정도의 지불하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난 귀여운 콘셉트로로 정하고 메이크업부터 의상까지 케어를 받으며 나의 가장 젊은 날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중에 앨범과 CD를 보니 연한 화장부터 진한 화장까지 사진작가의 지시대로 사진을 찍다 보니 결국 섹시 콘셉트까지 나왔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연히 엄마가 그 사진을 보고 이상한 곳에서 일 한건 아닌지 의심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고 싶은 건 다하면서 후회 없이 살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우린 대만 전국 투어도 했다. 대한민국 보다 작은 나라, 전국 투어를 여행해도 4~5시간이면 충분했다. 대만은 어느 곳에 가도 미식의 나라인 만큼 로컬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대만 친구들도 함께한 여행이라 그런지 가는 곳곳마다 눈과 입이 호강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현지들만 알고 있는 대만의 제주도 같은 펑후섬이다. 대만 서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은 항공편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배편으로 이동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물이 너무 깨끗하고 바라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몰, 사진으로 담기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민박집에서 우린 모두 꿈 많던 청춘을 마음껏 즐기며 사진으로 가슴으로 행복을 담았다.


여름 방학의 추억은 또다시 시작될 다음 학기의 고된 여정에 활력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신학기가 시작되고 졸업 학점을 위해 다시 들이대기 권법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이번엔 앞에 나가서 발표도 하고 재미나고 신나게 새로운 대학 생활을 만끽하며 고대하던 눈물겨운 학점을 받았다. 일본인 내 친구도, 유학생 모두에게 폭풍 칭찬을 받았다. 2006년 2월 1년 만에 다시 대한의 딸로 일본으로 금의환향했다. 힘들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받던 꿈같던 1년을 보내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친구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며 당당하게 학점을 받아왔다며 학교에 서류를 제출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또다시 나를 둘러싼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3주 뒤가 졸업식인데 전례가 없던 일이라 졸업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2025년 현재까지 학점을 받아온 사람이 나 혼자였다. 난 여전히 우리 학교의 전례가 없던 일을 만든 대한의 딸인 것이다. 나의 유학 비자도 2월 까지였고 막막하던 그때, 졸업을 10일 앞둔 어느 날 인가 졸업 승인이 떨어져 급하게 졸업 때 입을 기모노와 머리를 해줄 미용실을 예약할 수 있었다. 한국의 부모님도 졸업식에는 오고 싶어 했으나 졸업 승인이 늦게 나와 안타깝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으면 관광비자 3개월을 받고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라 졸업할 수 있는 것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다행히 같이 유학한 친구의 아버지의 소개로 나고야의 상사에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나고야라는 시골 도시는 내가 살아본 적 없어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렵게 배운 중국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곳이라 또다시 짐을 싸서 낯선 곳에서 직장 생활을 홀로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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