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체유심조 Sep 02. 2023

하루하루가 선물이다

나는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탄다. 땀도 많이 흘린다. 여름철에는 얇은 옷으로 조금이라도 더위를 이겨내 보려 한다. 그래서인지 여름철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겨울에는 여름과 달리 옷을 많이 껴입어 몸이 풍성해 보여 더러 오해를 하는 것 같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안하기도 우습기도 하지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시골이다. 학교 옆 넓은 들판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놀이터라고 해봤자 놀이기구는 볼 수 없는 풀만 무성한 들판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풀들이 자라기 시작하면 학교가 마치기 무섭게 친구들과 들판으로 내 달린다. 간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들판에 피어 있는 삘기는 자연이 내어주는 특별한 맛이다. 껌처럼 질근질근 씹으면 풀향이 어우러져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누가 더 길고 많이 뽑는지 내기를 하며 풀숲을 헤치고 다녔던 적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맛을 이제는 돈을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다.

 들판 옆으로는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긴 개천이 있었다. 더운 여름철이 되면 개천은 동네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우리는 학교가 마치면 가방을 든 채로 냇가로 뛰어가 속옷만 입고 물놀이를 했다. 물이 가슴께까지 오는 깊은 곳도 있다. 바위 위에 올라가 물 미끄럼을 타고 물에 풍덩 뛰어들면 하늘을 나는 듯한 짜릿함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정신없이 놀다보면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린다. 문득 집에 돌아가 젖은 옷 때문에 엄마에게 혼날 일이 생각나면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 위에 옷을 말려서 입고 집으로 가곤 했다. 밤이 되면 어두움을 틈타 동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한 냇물에 씻어내린다. 여름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밝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달빛을 타고 동네 어귀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마산가포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가자고 하셨다. 어릴 적 나에게 마산은 큰 도시였다. 가포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간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수영복이라고 해봐야 평소 입던 런닝과 반바지가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튜브를 타며 해수욕을 한다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거기다 바닷가에서 먹는 간식의 맛은 말해 무엇 할까? 오빠는 수영을 잘해서 바다 안쪽까지 수영을 하며 놀았다. 하지만 겁이 많은 동생과 나는  튜브 하나에 팔을 끼우고 발만 파닥닥거리며 헤엄치며 놀았다. 뜨거운 햇살에 온 몸이 그을려도 마냥 신나고 좋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촌티나는 수영복을 입고 있는 어린 나는 빛바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이제 어릴 적 추억은 개발이라는 이유로 회색빛 콘코리트 아파트에 밀려 버렸다. 뛰어놀던 들판은 달리는 자동차에 깔려 버렸다. 튜브 띄우며 물놀이 하던 바닷가는 인근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오폐수로 인해 해수욕장이 폐장되었다. 최근에는 매립을 하여 공장과 위락 시설들이 들어서고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지형이 달라져 버렸다. 발전이라는 이유로 세상은 변해가고 나도 세월 속에 묻혀 변해간다.     

커서는 도시에서 학교와 직장을 다녔다. 나의 DNA속에 박혀 있는 RH자연형은 쉬는 날만 되면 산과 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특히나 여름철에 등산을 한다는 것은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기에 충분하다. 걸으면 걸을수록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한계치를 느낄 때쯤 만나게 되는 계곡물은 구세주가 된다. 숲 그늘에서 지친 몸을 계곡물에 담그면 하늘의 선녀가 동앗줄을 타고 선녀탕에 목욕하러 왜 내려왔는지 알겠다. 복잡한 휴가철이 지나고 난 한적한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먹었던 컵라면 맛은 여름철만 되면 나를 유혹한다. 


나는 지리산 산속에서 살고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그늘을 드리우면 만물의 안식처가 된다. 사시사철 집 옆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한여름 더위에 지친 몸을 비단같은 물결로 감싸 안아준다. 마음 가는대로 내 딛는 나의 걸음걸음이 놀이터다.. 지금의 하루하루가 선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니가 있어 좋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