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의 마법 5. 장난처럼 웃고 있는 말들

말맛: 부사의 마법 5

by 나일주

부사의 마법 5. 장난처럼 웃고 있는 말들

— 기어이, 고작, 그저, 아무렴, 하긴



말은 때때로 진심을 숨기고 장난을 친다.그 말이 진짜인지 농담인지 듣는 사람도 헷갈리게 만들면서, 속뜻은 분명히 전하는 부사들이 있다.


말장난처럼 웃고 있지만, 사실은 똑똑하고 눈치 빠른 말들.

오늘 소개할 부사들이 그렇다.




‘기어이’는 고집이 있는 말이다.


아니, 의지의 끝판왕이다.


"기어이 해냈다."
"기어이 거기까지 갔다."


여기서 ‘기어이’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기와 끈질김이 있었는지를 한 단어로 요약해주는 부사다.

그리고 종종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말 없는 물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래서 '기어이'에는 반쯤은 감탄, 반쯤은 혀를 차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고작’은 말끝을 눌러버리는 부사다.


"고작 이거야?"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돼?"


수치나 크기보다, 기대와 실망의 간극이 핵심이다.

‘고작’이라는 말은 항상 무언가를 하찮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쓰는 사람은 우위에 서고, 듣는 사람은 작아진다.

하지만 때로, 스스로를 향해 ‘고작’이라 말할 때는 자조적 유머와 겸손의 말맛이 되기도 한다.


"내가 고작 그런 일로 울었구나."


이런 문장은 오히려 읽는 이를 따뜻하게 만든다.



‘그저’는 변명도, 주장도 없는 말이다.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방식.


"그저 좋았다."
"그저 바라만 봤다."


그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하면 오히려 감정의 결이 깨져버릴까 봐, 말끝을 부드럽게 흐려주는 부사다.


‘그저’는 감정의 고백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여백에 가깝다.



‘아무렴’은 말맛을 아는 사람의 유머다.


"아무렴, 내가 그걸 모르겠어?"
"아무렴, 네 말이 맞지."


이건 동의인데, 너무 당연해서 조금 비꼬는 느낌도 난다.그래서 친한 사이에 쓰면 정겹고, 모르는 사람한테 쓰면 싸할 수 있다. 이 미묘한 말맛의 줄타기 때문에 ‘아무렴’은 센스 있는 사람의 장난감 같은 부사다.

한마디로, 말장난을 해도 품위는 지키는 말이다.



‘하긴’은 말의 여지를 남긴다.


"하긴, 네 말도 맞지."
"하긴, 내가 그땐 좀 심했어."


이 말은 한 발 물러나는 말이다. 처음엔 부정하거나 딴소리를 하다가도, 결국은 살짝 수긍하며 체면을 살리는 방식.

‘하긴’이라는 말은 다투고 싶지 않은 사람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 "하긴 뭐…" 하고 말끝을 흐릴 때, 그 사람은 지금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 다섯 부사는 논리보다 뉘앙스를, 사실보다 분위기를 먼저 세운다.

말의 표정이 있고, 속마음에 짓는 미소가 있다.

이런 부사들을 쓰는 사람은 말을 정보가 아니라 놀이처럼 다룬다. 때론 장난처럼, 때론 빈정대듯, 그런데도 듣는 이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다.


"기어이 가더라, 그 사람."
"고작 그 말 하려고?"
"그저 좋았다, 그때 그 공기."
"아무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하긴, 나도 좀 그랬지."


이런 문장들은 눈치와 마음, 말재간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부사의 역할은 그래서 말의 윤곽을 흐리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은 더 또렷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한숨을 섞은 듯, 인생의 결이 느껴지는 부사들을 다룬다. 결국, 이제야, 어쩌다, 이따금, 늘… 세월이 말끝에 내려앉을 때 문장은 어떻게 달라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