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맛: 부사의 마법 4
말도 춤을 춘다. 가끔은 리듬을 타고, 어떤 날은 몸짓처럼 움직인다.
그럴 때 문장은 정보가 아니라 움직임의 그림이 된다.
오늘 만날 부사들은 그림을 그리진 않지만,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움직이는 풍경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말들이다.
무언가를 챙기는 동작, 손이 분주하긴 한데, 그 안엔 묘한 체념이 섞여 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이 말엔 이유도 설명도 없다. 그냥 떠나는 뒷모습이 쓸쓸하게 그려질 뿐이다.그래서 주섬주섬에는 늘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발음이 정확하고, 문장이 고르다. 마치 연필로 그은 선처럼.
"또박또박 말해봐."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이 부사는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건성으로 하지 않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제대로 하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또박또박 한다면, 그건 대체로 그 순간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살짝 건드리는 말이다.
"슬슬 가볼까?"
"슬슬 시작해보자."
본격적인 건 아직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슬슬’은 준비도, 실행도 아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슬슬이라는 말은 늘 여유가 있고,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다.
계획대로, 예상대로,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될 때 나오는 말.
"일이 척척 풀려."
"문제도 척척 해결하더라."
말맛은 시원하다. ‘척척’이라는 두 음절에서 뭔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래서 이 말을 들으면 능숙함이 느껴진다. 혹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감정이 살짝 따라온다.
그건 마음의 태도다.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어슬렁거리며 골목을 돌았다."
이 말에는 목적이 없다. 급한 일도 없고, 딱히 방향도 없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걸음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슬렁어슬렁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무렇지 않게 사는 법’을 담은 철학인지도 모른다.
이 다섯 부사는 문장을 멈춰 세우지 않고, 흐르게 만든다.
소리와 몸짓, 리듬과 기분이 같은 결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의 말도, 삶도, 조금은 부드럽고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또박또박 말해줘서 고마워."
"슬슬 끝낼까?"
"일이 척척 진행돼."
"어슬렁어슬렁, 그냥 걷고 싶었다."
이런 말들은 의미보다 먼저, 이미지와 리듬으로 와닿는다.
그리고 그런 말이 사람의 마음을 더 오래 붙잡는다.
다음 편은 말맛으로 장난치는 부사들을 만난다. 기어이, 고작, 그저, 아무렴, 하긴… 진심인지 농담인지, 말의 끝에서 슬며시 웃고 있는 그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