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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얼리 May 14. 2021

국민의 관심사 : 흐릿한 죽음

"어디라고 기자가 오냐"… 그러게 말입니다.

‘의대생’이 죽었다.

나는 그의 영정 앞에서 울었다.


처음엔 실종이었다. 실종된 아들을 애타게 찾는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어느 주말 한강공원에서 친구와 술을 마신 뒤 사라졌다. 무탈하게 찾을 수 있길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가 시신으로 돌아왔다.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종종 내가 그랬듯 새벽에 한강공원을 찾아 친구와 술을 마셨을 뿐이다. 아버지의 절규가 며칠째 계속됐다.     


나는 유족의 울분을 가장 가까이서 들었다. ‘함께 있던 아들의 친구가 수상하다’며 내보인 음성파일을 들었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했다가 <보고>로 정리해 선배에게 전달했다.     


“빈소까지 찾아가 취재하는 게 참 안 좋은 걸 알지만, 거기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너는 진심으로 들어줄 줄 알잖냐. 네가 가자.”

처음 선배께서 내게 장례식장에 가서 유족을 만나보라 했을 때는 선배가 미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와 비슷한 나이, 같은 성별의 미용사가 죽었다. 조의금을 뽑아 봉투에 넣었고, 손에 땀이나 봉투가 흐물흐물해졌다. 사인펜으로 이름 석 자를 쓰니 번졌다. 봉투를 한 손에 쥐고 떨면서 장례식장을 찾아갔고 유족을 만났다. 여쭐 게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안녕하세요.”

조의금부터 전달했다. 기자라고 밝혀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족의 눈을 마주쳤다 내리깔았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희태 친구예요?”

속으로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 기자인데요.”

처음으로 직업을 밝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직업을 명분 삼아 이곳까지 온 게 죄송해서 눈물이 났다. 사고로 죽은 그. 가족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통곡했고, 나는 사망 전후 장면이 계속 생각나 더 울었다. “우리 딸 같네.” 그날 5시간 동안 장례식장에 머물며 이야기를 들었다. <보고>로 정리했고 “잘했다”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장례식장을 찾아간 게 한강 대학생을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정정. 조문이라는 말은 위선이다. 취재하러 간 것이다. 이번에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유족들은 기자라고 내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다. 앉을 자리를 안내해주시고, 편하게 얼마든 머물면서 유족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시간도 나눠주셨다. 보통 장례식장엘 가면 “어디라고 기자가 오냐. 미친 거냐”와 같은 이야기도 듣는다. 물론 나는 들어 마땅하다 생각한다.     


수 시간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날도 들었다. 그다음 날은 발인이었다. 추도사부터 발인, 화장까지 지켜보았고 유족들과 함께 했다. ‘이게 맞나’는 질문을 속으로 수천 번 하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옮겨 다니며 엉엉 울었다. 한 번은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동료 기자가 “너 기자 맞냐”라고 꾸짖기도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는 얼마나 ‘참기자’길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고, 기사를 만들고 있었다. 편집 선배가 물었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누가 기억이나 해줄까.” 기사를 완성하고 퇴근하다 친구랑 통화를 했다. “내 친구도 공원에서 산책하다 실종됐었고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왜 이번 일은 이렇게 다들 주목하는 거야?”     


의문점이 많아서 그렇다고, 당시 친구가 같이 있지 않았냐고, 아직 부검 결과가 안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죽은 그와 그의 가족을 생각한 설명이기도 하고, 내가 쓴 기사를 위한 방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망 초기 몇몇 사람들이 주목했던 건 ‘앞으로 의사 돼서 탄탄대로만 남은 아이었는데’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전개는 언론에서 만든 것이었다. 기사는 ‘의대생’이라는 따옴표를 달고 높이 날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궁금하고, 직업적으로는 답답하다. 수사 진행 과정 하나만 새롭게 알았을 뿐인데, 별 내용도 담지 않고 [단독]을 달고 관련 기사가 나가는 타 매체를 바라본다. “국민들이 이것까지 알아야 하나. 그에게 도움은 되는 걸까.” 한 번 나간 오보는 걷잡을 수 없이 기정 사실화돼 또 다른 경우의 수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다룬 소설이 내가 아는 것만 20개가 넘는다. 아버지도 이를 힘들어하셨다.     


한강에서의 흐릿한 죽음 이전에, 명백한 죽음이 있었다. 무엇이 명백한가, 죽은 경위가 또렷하다. 영상으로도 남아있다. 평택항에서 알바를 하던 대학생이 300kg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나도 빈소를 차린 뒤에야 알게 됐다. 아직 한 번도 그 빈소는 찾아가지 못했다.     


“선배. 저 평택항을 가보고 싶습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높아서 우린 한강에 계속 있어야 해.”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말이 웃겼다. 크흡. 흘러나오는 비웃음을 마스크 속에서 참았다. 인과관계가 과연 저게 맞나. 결국 내겐 죄송스런 빈소 취재 끝에 몇 줄의 기사만이 남아있었다.     


조회 수 1위! 축하해.

눈앞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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