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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얼리 Mar 05. 2023

사랑하는 '너의' X

  운명에 집착했다. 운명은 나를 대체불가능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운명이라는 건 그 자리에 내가 유일하다는 의미니까.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걸 운명론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다. 아, 이 사람에게 나는 꼭 있어야 하는 존재구나. 그럼 밉기만 한 나라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사랑이 그에게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면 운명론이 부숴진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전 애인들과 나 사이를 평등하다 규정했다.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다 각인시키기 위해 발버둥쳤는데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사랑했다. 그의 전 애인, 그들의 전 애인들, X를 그래서 죽어라 미워했다.



X1

  1은 피부가 뽀얗다 못해 하얬다. 블러셔를 하지 않아도 볼은 핑크빛이었고, 거기에 눈웃음이 얹어지면! 사랑스러움의 인간화라고 할 수 있겠다. 1은 중학생 때부터 그의 친구였다. 헤어진 후에도 1은 그를 여전히 좋아했고, 그도 친구로서의 1을 좋아했다. 그와 나는 사내커플이었고, 1은 우연히 우리 회사 건물에서 일했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많았다. 1은 나를 조금은 미워하는 듯 했고, 그런 1을 보면서 나는 알량한 성취감을 느꼈다.


  나는 그를 짝사랑했고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도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지인들은 나와의 연애를 의아해했다. 그들은 그가 1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고, 그가 1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지켜봤다. 둘이 헤어진 이후에도 그들은 1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과 술집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1은 활짝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고 그는 태연한 척하며 손을 흔들었다. 술 마시는 내내 그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과 멀어지라 했다.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1이 “워!”하며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순간 1이 나를 보고는 당황했다. 나를 보지 못한 채 장난을 치려했던 거다. 1의 투명한 표정 덕에 둘이 내 눈치를 보며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에서 일기장을 펴고 1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나와 다른, 그렇기에 더 예쁜, 그런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웃을 때 천사같음, 피부가 하얌, 옷을 잘 입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성격 좋다 평가함, 지각한 적이 없음, 이름도 예쁨, 손이 길고 고움…’


  추락하고자 하는 욕구가 치솟았다. 1과 나를 비교했다. 어떻게 하면 닮을 수 있을까 성형외과를 찾아 넌지시 물었고, 다정하지 못한 내 성격을 증오했다. 특히 그와의 관계에서 불안할 때면 1에 대해 생각했다. 1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어느 날은 1의 해맑은 웃음이 보고싶어져 찾아가기도 했다. “너 정말 예쁘다. 네가 제일 예쁜 것 같아.” 1은 당황했다.


X2

  그와의 첫 만남, 마들렌을 만들었다며 내게 건넸다. 생일이면 미역국에 더덕구이, 새송이 스테이크로 상을 채웠고, 야식이 먹고 싶을 때면 나폴리탄 파스타를 내왔다. 그가 요리할 때 나는 식탁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촬영한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그의 등이 너무 사랑스러울 때면 가서 포옹도 해본다. 그는 어떤 음식이든 정확하게 두 사람 몫을 만드는데, 2와의 오랜 연애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었더라.


  예쁘고 유능한 의사. 2를 대략 묘사하자면 그렇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2와의 시간이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그 중 절반이 같이 만든 음식이고 나머지 절반이 공부하는 2의 모습이다. 그는 같이 사진을 보며 “정말 독한 친구였어”라 덧붙였다. 그와 만나며 2는 레지던트에서 대형병원 전문의가 되었다. 자기 분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요리나 역사, 언어, 예술같은 분야에서도 박학다식했다. 2는 그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또 충족해주는 사람이었다.


  그와 헤어진 2가 결혼을 했다. 2가 먼저 그에게 연락해왔고 그는 진심인지 모를 축하를 했다. 그들이 헤어진 건 2가 병원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는 퇴근 후에도 병원에 남아 해외 연수를 가기 위해 준비했다. 2에게는 필요한 커리어였지만 그는 연수 가는 것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막아섰다. 사랑하는 마음이 소진되지 않은 채 그는 차였다.


  2를 닮은, 혹은 2와 잘 맞았던 그도 역시 아는 게 많았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척하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어느 날 그는 “체코 민주 운동 한 사람 이름 뭐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하더니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의 나를 보고는 “아! 둡체크. 너 둡체크를 모른다고?”라며 놀랐다. 또 다른 날은 “너 정말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 물었다.


  나는 갈수록 작아졌다. 급하게 그가 던진 지식들을 흡수해보려 하지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아”라며 데이트 횟수를 줄이자고 했고 나는 이에 대해 불평하지 못했다. 속으로 ‘같이 있어도 네게 도움이 안 돼서 그렇구나’, ‘내가 아니라 2였으면 어떻게든 더 자주 만나고 싶었겠지’ 생각하며 무너질 뿐이었다.


  2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2에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만 반복했다. 2를 떠올리고 나니 내가 2보다 나은 점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가 2가 아닌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시기가 나빴던 2와의 관계를 대신함이 아니었을까? 요리라도 잘해보자고 연습하던 주방은 토마토 자국으로 엉망이 됐고 사방으로 튄 빨간색은 지워지질 않았다.


  빨간 자국과 그가 둘다 희미해져갈 때쯤 2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인터넷 기사를 통해. 2에게는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2의 팬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2의 전공인 신경과, 특히 2가 연구하는 치매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X3

  그도, 3도 불안함을 달고 살았다. 3은 불면증을 앓았고 그는 의지가 돼주고자, 동시에 본인도 안정감을 얻고자 매일같이 3과 잠을 잤다. 섹스는 필수가 아니더라도 함께 자는 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3과 헤어진 이후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었다. 친구들을 찾아가 3이 보고싶다며 울기만 했다. 반년을 폐인처럼 지내다 나를 만났고 상태를 회복했지만, 공황장애로 여전히 힘들어했다.


  그에게 나는 지나치게 건강했다. 나는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었지만, 그는 자주 침대에서 벗어나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는 적대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먼저 보지만, 그는 아주 빠르게 단점을 찾아 방어태세를 취한다. 나는 롯데월드 자이로드롭을 연속 세 번 타지만, 그는 공황 발작의 느낌을 왜 자발적으로 느끼려느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했다.


  그는 3을 사랑했지만 자신을 미워하듯 3도 미워했다. 그래서 헤어졌고 정반대의 나를 만났다. 대신 나에게는 그 어떤 불안도 티내지 않으려 했다. 잠 잘 때 발작이 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섹스는 해도 같이 자진 않았다. “어차피 너도 날 떠날 거잖아”라며 눈물 젖은 말을 뱉어놓고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함구했고, 아무리 “너의 모든 모습을 사랑한다”(진심으로 한 말이었다)해도 가까워지기보단 한 발짝씩 더 멀어졌다.


  그러다 그가 사라졌다. 답장이 없어서 처음에는 화가 났고, 전화까지 받지 않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이틀이 넘어가니 친구들에게 물었는데, 친구들도 행방을 몰랐다. 나흘이 되자 그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집에 있는데, 왜? 연락 안 되니?” 안심했고, 그를 바꿔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보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미안”이라며 돌아왔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조차 설명해주지 않는 그의 상태를 물어볼 곳이 없었다. 3이 생각났다. 3과는 고통도 함께 느끼고 불안함도 나누었겠지. 3은 말하지 않아도 그를 알았겠지. 결국 3이 부럽다는 생각, 3이 가진 정신적 고통을, 불면증을, 약함을 닮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약한 건 내버려둘 수 없었을 테니까. 그가 내게 “강하다” 말했던 건, 그가 나를 뿌리쳐도 내가 괜찮을 걸 안다는, 그렇기에 종종 그렇게 하겠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질투는 X에 대한 집착이 됐다. X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내겐 없는 결함이었다. 나와 X를 세세하게 비교했고, 모든 면에서 X가 탁월히 나았다. X 얼굴의 비대칭은 개성이 되고, X의 꽉 막힌 사고는 풍족한 집안 환경에서 나오는 고결함이 됐다. 나는 X의 SNS를 수시로 염탐했고 자발적으로 내 숨통을 조였다. 지금 나는 X1, X2, X3을 찬탄한다. 그의 X에게 애정을 느낀다면, 나는 그를 떠난 준비가 된 거다.


  결코 말하지 않을 속마음, 하지만 그에게 하고 싶은 단일한 이야기. “X는 의미 없다고 해줘. 내가 너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말해줘. 나는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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