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까투리

권정생, 낮은 산

by 반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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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 이야기 써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충분하다고 봅니다.


좋은 그림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면지)'



첫 아이를 가지고 태교를 위해 음악 시디를 구입했습니다. 백창우 선생님의 태교 음악이었어요. 그중에 자장가가 있었는데 노랫말도 너무 곱고 리듬도 좋아서 흥얼흥얼 따라 불렀었습니다. 후에 아이를 낳고 우연히 극장판 엄마 까투리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만화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영화에 빠져있던 순간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내 뱃속에서 듣던 노래를 세상밖에 나온 아이와 듣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몽글했습니다. 감미로운 음악에 빠지기도 잠시, 어느새 저는 아이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너무 슬픈 영화였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엄마 까투리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만은 아닙니다. 물론 아이들도 보면 좋아할 만 하지만 어쩌면 선생님께서는 어른을 위해 이 책을 쓰셨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이 책은 어머니들에게 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자식을 낳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모성에 대해서 이렇게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린 책은 없다고 봅니다. 아마 제가 아이를 낳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냥 눈물을 뽑기 위해 만든 책인가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게 부모다 싶습니다. 나도 불이 나서 내 아이를 구해야 한다면 아마도 저렇게 했을 거다 싶습니다. 어미에게 자식이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니 안도현 선생님의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간장게장 속에 녹아드는 엄마 게가 알들이 무서워할까 봐 이제 불 끄고 잠들 시간이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말이죠. 두 분의 글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어찌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남자가 이렇게도 모성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결혼하기 보름 전 친정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렸습니다. 결혼식이 2주가량 남았는데 너무나 슬퍼서 엄마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접게 해 준 것이 아들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어머니가 '아가, 아직은 아니다. 네 자식을 낳고 더 살다가 오너라 '하는 것 마냥 새 생명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셋 낳았습니다. 도와줄 친정 엄마도 없이 혼자 셋을 키웠습니다. 대신 엄마는 본인이 설 자리에 언니를 놓고 가셨습니다. 아마 언니가 없었더라면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엄마의 뼈와 살을 갈아 넣는 일이라 내 자신을 내려놓고 오롯이 부모가 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먼 훗날 대가를 바라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나의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질 것 같습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희생이 아닌 잠시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었습니다. 엄마 까투리가 죽고 나서 아기 꺼병이들이 엄마 날개 죽지 아래서 자고 먹고 성장하듯, 자식은 부모의 날개 아래서 커 가는 이였습니다. 젊은 날의 나, 성공하고 싶은 나,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나를 잠시 내려놓고 내가 세상에 만들어 놓은 어린 생명을 책임지는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에게 필요한 시기가 끝나고 나면 거죽만 남아 오롯한 나는 사라지고 없을지라도 그게 부모로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서 배웁니다. 부모의 사랑을 인간이 아닌 동물에 비유한 것도 권정생 선생님의 깊은 뜻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이야기했다면 그게 뭐 당연하지 했을 이야기를 인간보다 하등 한 동물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보다 덜한 동물도 저렇게 사는구나 싶으면 우리는 그보다 낫게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부모가 되는 의미를 작은 까투리에게서 배웁니다. 훗날 아이들과 이별할 때가 오면 날갯죽지 접고 편안하게 쉬어야겠습니다. 그들의 이불이 되어 준 것 만으로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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