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림, 위즈덤하우스
세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히 때가 되면 아이들이 기관에 가는 줄 알았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올해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을 2년 하고 나면 아이들을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을 보낸 후 복직을 해야지. '
그렇게 계획대로 내 인생이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아보니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다섯 살, 첫째의 첫 어린이 집을 골라 첫 등원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습니다. 엄마와 처음 떨어지는 아이는 노란 버스를 타고 마치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가듯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엄마는 집에 돌아와 가시 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침에 본 아이의 모습이 떠 오를 때마다 같이 울었다지요. 어린이 집에서 돌아온 아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식판이 깨끗합니다. 요즘 어린이 집에서는 식판을 씻어 보내주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집 밖에서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도 잘 먹지 않는 아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점심도 먹지 않고 온 아이의 집에는 다음날, 그다음 날이 되어도 전화 한 통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그렇게 점심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하고 첫 등원을 마쳤습니다.
다음 날 또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또 노란 버스에 실려갔고 엄마는 또 집에 와서 하루 종일 눈물바람 이었었답니다. 오늘도 아이가 점심을 먹지 못하고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두 번째 날 버스에서 내리는 아들은 입에 케첩이 묻은 채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래도 뭔가 먹고는 왔구나 싶어서 마음이 좀 놓였드랬습니다. 세 번째 날 아이는 또 울면서 어린이 집을 갔습니다. 더 이상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엄마는 그렇게 삼일째 날 밤, 아이를 더 이상 어린이 집에 보내지 않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원장선생님이 화를 내고 빈자리를 어쩌냐고 투덜거리셨지만 우리 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온 것도, 아이가 밥을 못 먹었다는 전화한 통 주지 않는 것도 따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적응 못하는 소심한 아이를 둔 엄마의 죄다 여기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첫 등원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내 아이의 첫 기관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인생의 실패 같아서 다섯 살 아이가 실패자가 된 것 같아서 엄마는 엉엉 울었더랬습니다. 물론 그 이후 더 나은 길을 찾아 아이는 잘 자랐습니다. 지금도 잘 자라고 있고요. 엄마랑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기관에 적응을 못한다고 해서 그 어린 영혼이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가 있으니까요. 그 길은 또 새로운 길로 이어졌으니 다른 책을 만나 또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우리 아이같이 첫 기관이 힘든 아이들에게 항상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난다고요. 네가 선생님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고 오는 동안 엄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겠다고요. 그리고 네가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노란 버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요. 비록 저는 그 말을 해주지 못했지만 나중에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 내 아이의 아이를 기다리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머니는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즐겁게 잘 놀다가 오렴!'
하며 돌아오는 노란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울지 않고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비록 내 아이에게는 해 보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그래도 잘 자란 내 자식의 자식에게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