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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Nov 27. 2023

눈이 온다, 월요일 출근길

설레는 이 맘 어쩔


선생님, 월요일 눈 많이 와!
엄청 엄청 많~이 와!
월요일 빨리 오면 좋겠어!


지난주,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S가 말해주다. S는 캐나다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와 함께 연길에 살고 있우리 반 아이다. 올해 한국인 친구들과 공부하기 시작하며 한국어가 급속히 늘었는데, 영어와 중국어의 영향인지 높임말은 잘 쓰지 않는다.(무서운 선생님한테만 쓰는 것 같다.)

 과연, S말이 맞았네!


아침에 무심코 커튼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밤새 내렸을 텐데 아직도 펑펑 쏟아지고 있다. 언제 이렇게 많이 내린 걸까. 어젯밤 꽤 늦게 잤는데 나는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한번 내린 큰 눈은 얼음이 되어 우내 녹지 않고 3월까지 머문다. 때로는 4월에 다시 내리기도 한다. 눈 때문에 며칠 째 기차나 버스가 끊기는 일도 있다. 그게 바로 이곳 북간도, 연변이다.


잠이 덜 깨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마음이 금세 촉촉해지며 설렘이 차오른다. 눈곱을 뜯어내고 노란 코를 휑 풀면 가장 최근의 연애(그러니까...그게 25년 전)부터 초딩시절 짝사랑 교회오빠까지 거슬러 소환한다. 한 때는 나도 사랑받던 여자였는데, 이렇게 눈 오는 날이면 알콩달콩 하루종일 재밌게 놀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혼자  속을 뚫고 출근해야 한다.  


여름과 가을 내내 대기시켜 놓았던 '동북 호랑이 부츠'를 꺼내 신고 시커먼 군밤장수 털모자도 눌러쓴다. 방한용 마스크에 두꺼운 장갑을 끼고 우산도 쓴다. 학부모는 물론이고 우리 엄마가 와도 알아볼 없을  차림이다.



신호등 앞에서 초록불을 기다리 주말 내내 정주행 했던 대만 드라마의 찜찜한 결말을 떠올린다. 결국, 12회 내내 분투했던 여자 주인공사업은 망했고 사랑하던 남자도 '떠났다'. 여기서 '떠났다'는게 그 여자 곁에 있다가 틋하게 떠난 게 아니라 일찌감치 아이 있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잘 살더니 결국 딴데죽었다는 말이다. 그 남자와는 12회 내내 대면대면해서, 사랑 고백은 물론이고 따뜻한 포옹, 키스 한번 못 해 본 사이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며 마지막 회 자막이 끝날 때까지 다 봤는데, 그냥 그게 끝이었다. 대만이 드라마를 이렇게 허망하게 만드는 나라였던가! 


남녀 주인공이 좀처럼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대만 명품드라마 <茶金>, 百度 캡처


4년 동안, 연길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제 2월이면 이곳을 떠난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이런 큰 눈을 보게 될까. 내 생애 몇 번이나 더 이런 큰 눈을 보게 될까.  누가 알겠는가. 이 눈이 내 생애 마지막 눈 일수도 있.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뽀드득뽀드득 꾹꾹 눌러 정성들여 걷는다. 희고 보드라운 이 길을 아끼 걷다 보니, 아무래도 괜찮은 거구나,  많은 고단한 밤들을 둘이 마주앉아 녹두죽 먹으며 주고 받았으니 그거면 된 거구나, 끝내 그 어떤 애정표현이나 소유, 약속 없이 여자를 외롭게 남겨 둔 것이 바로 그 남자의 존중이고 사랑이었구나, 그 여자는 알겠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는 바깥풍경이 바로 나의 내면 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 눈 오는 출근길이 참 아름답고 아쉽고 그립다. 기말, 일거리가 태산인데 설레는 맘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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