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지 마세요
어린이날을 맞아 교장선생님이 '모범어린이상'을 주기로 결정하셨단다. 그래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반에 한 명씩 뽑아 12시까지 명단을 보내라고 한다.
우리 반 아이들 얼굴을 쭉 훑어본다. 다들 제각각, 있는 그대로 예쁘고 대견한 28명의 아이들. 이 아이들 중 누구를 '모범어린이'로 뽑아야 할까. 누가 누구에게 '모범'이 된다는 말일까. 마음속에 언짢음의 파도가 인다.
자, 이제 공부시간이에요.
자기 자리에 앉아 국어책 꺼내주세요.
아이... 벌써요?
쉬는 시간은 왜 이렇게 짧아요?
공부시간은 그렇게 길면서...
쉬는 시간은 1초도 안돼...
투명테이프를 잘라 신나게 뭔가를 만들고 있던 산이가 아쉬움에 울먹이기까지 한다. 공부시간인 게 미안해서 나까지도 울 것 같다. 유치원 때부터 ADHD 약을 먹고 있다고,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며칠 전 산이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어오셨다. 공부시간에 잘 집중을 못해서 그렇지, 다른 친구를 괴롭히는 일 없이 늘 자신만의 다양한 흥밋거리에 빠져있는 착한 산이에게 모범어린이상을 주고 싶다.
아까부터 강이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을 모두 앉혀놓고 복도에 나와 강이를 찾는다. 당황한 얼굴의 강이가 남자화장실에서 나온다.
강아, 우리 공부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늦었어?
아까츰에, 방귀를 세게 뀌었더니
똥이 나왔어요. 그래서
화장실에 팬티 버리고 왔어요.
(웃음을 겨우 참으며) 팬티를?
팬티 없어도 괜찮겠어?
네, 학교에서 똥 묻으면
엄마가 그렇게 하래요.
엄마와 통화했더니, 과연 강이가 엄마와 약속한 데로 혼자 잘 처리한 거였다. 수업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강이가 일어선다.
선생님, 저 똥꼬가 찐득찐득해서
물티슈로 다시 닦고 올래요.
그... 래. 좋은 생각이야.
얼른 다녀와.
혹시 선생님 도움 필요하면 말해줘.
(물티슈를 달랑 한 장만 뽑는 강이를 보고)
근데, 한 장 가지고는 모자라지 않을까?
괜찮아요! 요렇게 접어쓰면 돼요.
돌발상황(?)에 의연하게 잘 대처한 강이, 그 와중에도 환경을 생각해 물티슈를 아껴 쓴 강이도 모범어린이상 감이다.
그 외에도, 몰랑이 연필이 없어졌다고, 우쿨렐레 방과 후 수업에 가기 싫다고, 선생님을 불렀는데 선생님이 못 들었다는 등등의 이유로 걸핏하면 목놓아 우는 버릇을 고친 별이도 모범어린이상을 받을 만하다. 친구들에게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어 우리 반에 대대적인 책 읽기 붐을 일으킨 들이도 모범어린이상을 받아야 한다. 친구들이 미쳐 치우지 않은 장난감을 "그냥 제가 치울게요." 라며 언제나 쿨하게 정리해 주는 인성인재 달이도 모범어린이다. 늘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해, 친구들을 위해 무거운 우유바구니를 가져오는 팔씨름대장 돌이도 모범어린이다.
이렇게 모두가 모범(?) 어린이인 1학년 교실. 28명의 어린이 중 단 한 명의 아이가 모범어린이상을 받는 순간, 나머지 27명은 안 모범어린이가 되고 만다. '벌'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을 파블로프의 개로 취급하는 '상'도 없어지면 좋겠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교무부장의 독촉을 받고 결국 나는, 유치원 때도 1학년 때도, 선생님 말씀, 부모님 말씀에 늘 고분고분하고, 친구들과 다툼 한번 일으킨 적 없는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한 여학생을 우리 반 '모범어린이'로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