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독한 순정녀라 한 사람만 사랑한다. 함정은, 그 한 사람이 자주 바뀐다는 거다. 음식도 그렇고 연인도 그렇고, 좋아하는 배우도 그렇다. 하나에 꽂히면 맹렬히 바닥까지 파헤치다 끝장을 보고서야 놓는다. (희한하게도, 공부나 업무, 청소 같이 유용한 것들은 여기 해당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진준걸(秦俊杰)이라는 중국의 젊은 연기파 배우에 대단히 '꽂혀'있다. 타국에서의 외로운 추석 연휴 기간 동안, 불 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이 매력적인 배우의 작품을 모두 섭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오래도록 맴도는, 그의 보석 같은 작품 하나를 발견했다. <55번째 편지>라는 30분 분량의 단편 드라마다.
한 할아버지가 '옛날 사진 복원 전문' 사진관에 들어선다. 그는 72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인물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얼룩진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 기념으로 이 사진을 찍으셨고, 어머니는 전쟁터로 나가는 아버지의 앞 섶에 이 사진을 고이 넣어주셨다. 그리고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피로 덮인 이 사진만 돌아왔다. 그동안 북경의 모든 사진관을 돌아다녔지만 늘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들어온 그는, 이제 이 집이 마지막이라며,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다며 사진사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전장에서 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아버지, 골목길에서 늘 편지를 기다리는 어머니. 아버지의 편지가 한동안 뜸하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갑작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아, 그토록 그리운이가10년 만에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둘은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다시 전쟁에 참전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오고, 역시나 물가에서, 이 슬픈 소식을 전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날 밤 임신 소식을 전하는 어머니.
세상에 무엇이 괴롭다, 괴롭다 해도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는 생이별보다 더한 괴로움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별의 괴로움에는 '곳'과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대체 어떤 곳이 이별하는 괴로움을 자아낼 만한 곳일까? 집도 아니요, 정자도 아니요, 산도 아니요, 들도 아니다. 그러나 물이란 풍정은 적실히 이별의 괴로움을 자아냄 직한 '곳'이 될 것이다.
커서 강과 바다요, 작아서 도랑과 개굴창만이 물이 아니다. 크건 작건 간에 되돌아올 길이 없이 흘러가는 모든 것이야말로 물일 것이다... 애끓는 이별들은 유달리 물을 이별 '곳'으로 삼고 있었다.
물의 정취를 나는 알고 있다. 옅도 않고 깊도 않고 잔잔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물결이 바윗돌을 얼싸안은 채 흐느껴 우는 것이 물이었다... 셋도 아니요, 넷도 아닌 단 두 사람이 소리도 없고 말도 없이 마주 설 때야 말로 세상에 이런 괴로운 자리가 또 있을 것인가...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다시 물가에 마주 선 두 사람. 이제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겠다는 어머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의 유일한 사진을 아버지의 앞가슴에 넣어준다.아이가 태어나는 이듬해 3월까지는 꼭 돌아올 테니 그때는 세 명이서 가족사진을 찍자는 약속을 남기고 아버지는 물을 건넌다.몇 달 후, 전장에서 보낸 아버지의 55번째마지막 편지가 도착하고 그 안에는사연 없는 하얀 종이만 들어있다.
감독은 《열하일기》를읽기라도 한 것일까, 이 젊은 부부의 생이별에는 그 흔한 눈물도 진한 포옹도 천둥번개 소나기도 없다. 그저 한가하게 떠 있는 하얀 구름과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 애틋한 눈빛만 오갈 뿐이다. 그럼에도 생이별의 절절함이 물가의 풍경으로 펼쳐지며 인간 본연의 깊은 슬픔과 비극이 전해진다. 영상이 한 편의 시가 되는 순간이다.
어려운 형편으로, 결혼식 대신 사진관에서 찍은 결혼 기념사진 한 장으로 부부가 된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옷깃을 매만져주는 어머니, 어머니의 옆머리를 귀 뒤로 곱게 넘겨주는 아버지, 두 분이 그렇게 찍은 유일한 사진이 결국 복원되고 할아버지는 70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처음으로마주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 다시는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젊은 아버지 역할을 나의 배우, 진준걸이 맡았다. 아,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