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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Apr 20. 2022

내 생각난 적 없어? 정말 없어?

다 끝났는데 기어이 찾아가 집요하게 물어본다

Do I ever cross your mind?


너무 신변잡기적인 소재라 안 쓰려했는데, 독자한테 쓸모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고 필자의 스치는 감상뿐이라 안 쓰려했는데, 레이 찰스가 부르는 이 노래를 자꾸 듣다 보니 안 쓸 수가 없어 쓰고 만다.

내 생각난 적 없어?
달링, 정말 없어?
어떤 상황에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정말 없어? 어?
허니,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내 생각난 적 없어?


노래는 느긋한 소울 리듬을 타고 부드럽고 집요하게 자꾸 묻는다. 꼭 원하는 답이라도 있다는 듯, 오늘 어거지를 써서라도 기어이 그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한데 필사적이 되면 될수록 노래 부르는 사람, 물어보는 사람만 더 처연해진다. 노래가 끝나면 그는 꼭 울음을 터트리고 말 것 같다.


비슷한 장면이 중드 <곡주 부인> 에도 나온다. 분명 어젯밤, 오랫동안 짝사랑해 사부님과 둘만의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다음날 신부는 사정도 모르고 다른 남자,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 속사정을 뒤늦게야 알게 된 여자가 그 길로 당장 남자를 찾아간다.


 물어보면서도 눈물이 글썽글썽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면 예에 어긋납니다."

"청해공의 진실한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왔어요. 정말, 전하의 백해(왕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는 액막이)가 맞나요?"

"……."

"맞습니까, 아닙니까!"

"... 직접 조사하셔서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어요."

"... 맞습니다. 저는 전하의 백해입니다."

"... 그동안 일말의 동요도 없었나요? 그동안... 자유를 회복해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싶은 마음이, 정말 조금이라도 든 적 없었나요? 그런 적이 있었다고 당신의 마음은 분명 말하고 있는데..."

"...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사람이란 늘 약해질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선택을 해야 하지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을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 게 뭐죠? 전하를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이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저를 포기한 대가로 당신이 얻은 건 뭔가요? "

"……."

"오늘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당신은 기어이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군요. 어렸을 때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당신은 내게 말했죠. 당신을 따라가 여자아이가 되겠다면 안일함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고요. 하지만 남자아이가 되겠다면 안일함 외에는 다  될 거라고요. 그때는 나 스스로 결정하게 했으면서 왜 이번에는 스스로 결정하게 두지 않았나요? 이제 오늘 이후로 당신과 나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에요."


겉으로는 빚 독촉이라도 하러 온 듯 무섭게 따져 물었지만, 사실 여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하고 외로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듣고 싶은 그 말을 끝내 해 주지 않는 남자, '오늘부터 너하고는 남이야'라는 폭탄선언도 눈 까닥 안 하는 남자, 울면서 돌아서도 붙잡지 않는 남자. 여자는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 방을 나갔을 것이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돌이킬 수도 없는데, 왜 묻는 걸까, 왜 굳이 찾아가, 얼굴 붉히며, 울고 불며, 구차스럽게 묻는 걸까.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무슨 장면을 보고 싶어서.


문득, 나도 오래 그 사람을 찾아가 늘 묻고 싶었던 그 말을 물어본다.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난 적 없어?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맘 속의 오랜 응어리가, 오랜 의문이 풀릴 것 같다. 그가 '응, 한 번도 없어.'라고 단번에 대답해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니, 있어.'라고 , 나는 할 말이 없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만 흐를 것 같다. 서로의 흰머리와 주름살, 뱃살이나 벗겨진 머리가 부끄럽고 어색할 것 같다. 아, 찾아가는 건 아니구나, 대놓고 물어보는 건 더 아니구나. 차라리 방구석에서 레이 찰스 노래를 무한 반복 듣는 게 낫구나. 그에게서 듣고 싶은 모범답안, 혹은 내가 그에게 들려줄 모범답안 상상하면서. 


'늘 네 생각이 나. 하지만 함께 할 수 없어서 슬퍼. 그래도 함께 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아. 너도 어딘가에서 그 기억 덕분에 씩씩하게 잘 살고 있겠지?'


 호홋, 아무래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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