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네들은 어떻게 할 거야?” 매해 정원 오프닝이 다가올 때마다 엄마에게 묻는다. 거창하게 오프닝이라고 부르지만 누가 오는 건 아니다. 아,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오지 않는다. 봄은 온다.
봄은 갑자기 찾아온다. 날짜가 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 동안 제2의 피부였던 패딩을 입고 잘만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어? 더운데?’ 하고 지퍼를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이 봄이 오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봄이 오기 시작하면 아무리 방임형 가드너라고 해도 분주해진다. 겨울 추위를 피해 실내로 들여놨던 식물들을 슬슬 내놓기 시작하고, 물을 주려니 한동안 안 쓰던 옥상 수도도 확인해 봐야 한다.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잎을 내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테니 화분마다 거름도 좀 얹어둔다. 겨우내 메마르고 꽝꽝 얼어서 “돌이라고 불러드릴까요?”하고 정중히 여쭤봐야 할 것 같은 상태의 흙은 밭 가는 소가 되어 곱게 갈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눈에 딱 들어오는 화분이 셋 있다. 이 셋은 “얘네들은 어떻게 할 거야?”의 ‘얘네’를 담당하고 있다. 엄마랑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한 때 텃밭 상자였었던 이들을 잠깐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로 두자!”, “계속 잡초밭인 걸로?”, “응.” 합의 끝. 매해 안건으로 올리기는 하지만 다른 의견이 나온 적은 없다. 손 네 개로는 식물의 끈질길 생명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몇 년에 걸쳐 몸소 습득했기 때문이다.
가장 첫해에 들인 텃밭 상자 세 개는 원래 상추밭이었지만 이제는 잡초밭이 되었다. 나는 정원의 정령이 전력을 잡초밭에 몽땅 쏟아붓고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식물들은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병충해로 죽고, 물이 너무 많거나 적어서 죽고, 너무 더워서 죽고, 너무 추워서 죽는다. 그런데 이 세 상자의 식물들만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 경이를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다.
더 신기한 건 애초에 옥상에 이 식물들을 데려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디 산에서 흙이라도 퍼왔으면 ‘아, 흙 속에 씨앗이 들어있었나 보네.’ 하고 이해라도 했을 텐데, 포대에 밀봉된 원예용 흙에 모종판 작물 몇 개 옮겨 심은 게 전부인 땅에 어느 날 잡초가 창궐했다. 텃밭 버전 좀비였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한 번 나타나면 그 상자는 다 잡초화 되게 되어있다. 뭐, 내가 게을러서 잡초가 이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 처음에는 잡초를 열심히 뽑아줬다. 그런데 뽑아도 그때뿐이지 또 나더라. 사람은 하나고 풀은 여럿이니 쪽수가 밀린다. 지쳐서 물러났다가 매해 봄이 오기 직전에야 몰아쳐서 대공사를 하곤 한다. 작업 장갑을 끼고 모종삽을 들고 와 텃밭 상자 밑바닥부터 뒤집어엎기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깨닫는다. 와, 왜 그동안 잡초밭에 손 안 댔는지 알겠다. 과거의 나, 똑똑한데?
팔을 걷어붙이고 뿌리를 뽑다 보면 내가 뿌리를 뽑는 건지 뿌리가 내 팔을 뽑는 건지 헷갈린다. 텃밭 역사상 최고는 단연 쑥 뿌리였다. 그 커다란 상자 텃밭 가장자리를 몇 바퀴나 빙빙 둘러 가며 아주 꽉 잡고 있더라. 땅속에서 에일리언이 나오는 줄 알았다. 쑥을 여기 몇 년 묵혀 놓았으면 몰라, 지난해 봄에 갈아엎었는데도 이 정도다. 전쟁 나고 방사능 오염된 땅에서도 제일 먼저 나기 시작하는 게 쑥이라더니. 이름처럼 미친 듯이 쑥쑥 자랐다.
쑥이 독보적인 MVP는 아니었다. 누구 하나 꿇리는 식물 없이 텃밭 상자 밑바닥까지 뿌리를 내리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옆으로 빙 돌아 자기네들끼리 자체적으로 지하 계주 트랙을 만들었다. 봄마다 잡초밭을 경작한다고 뿌리째 다 뽑아버리고, 흙을 열심히 뒤집어서 표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씨앗을 흩어버리고, 혹시 안에 남은 뿌리가 있거든 끊어놓으려고 모종삽 끝으로 푹푹 찔러대기까지 하는데도 늘 잡초가 이긴다. 마치 역경 따위 비웃어주겠다는 듯이 성실하게 세 상자를 꽉 채운다.
저 상자에 농사를 지을 생각이면 흙을 싹 다 버리고 새 상토를 넣어야 했다. 이 흙을 갈지 않고 농사를 지을 방법은 지금의 흙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팔팔 끓는 물을 부어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엄마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럼 그 안에 있는 애들 다 죽는 거 아니야?” 예, 어머니. 인류는 그것을 소독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잔혹한 악당을 보는 것처럼 나를 보는 엄마의 눈빛에 모처럼 귀차니즘을 뚫고 나온 열혈 농부의 영혼은 쪼그라들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흙 속의 꼬물이들을 고문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전투는 멈추고 위대한 생명력에 존경심이나 표하자.
빠른 태세 전환 후, 잡초밭은 야생화 정원이 되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보물 밭이었다. 가지각색의 잎과 꽃과 향과 씨앗을 보여주는 텃밭 요정들이 살고 있었다. 이걸 다 놓치면 어쩔 뻔했나. 일부러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지 않아도 무엇이 황금인지 모른다면 다 돌로 보이는 모양이다. 팔팔 끓는 물이 든 주전자를 내려놓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무척 신이 난 목소리로 “오리 보여줄게.” 하더니 나를 옥상으로 끌고 갔다. “무슨 오리?” 했는데 잡초밭으로 가더라. 엄마가 잡초밭에서 똑 따서 내게 내민 것은 포에 쌓인 달개비 열매였다. 신기하게도 진짜 오리 모양이었다. 달개비의 다른 이름은 닭의장풀이라면서 닭 대신 오리가 나와서 웃겼다.
냉이 씨앗 주머니에서는 작은 하트를 찾을 수 있다. 손이 여러 개인 애가 그 많은 손을 전부 써서 손가락 하트를 날려주는 것 같다. 봄에 피는 작고 하얀 꽃도 하트 주머니만큼이나 사랑스럽다. 꽃다지도 생긴 건 냉이를 닮았다. 꽃이 노란색이고, 잎이 냉이보다 덜 톱니 같고 보송한 털이 나 있는 것만 빼면.
계란 같이 생긴 친구도 있다. 열매를 맺는 진짜 꽃이 모인 중심부가 노랗고, 곤충들의 관심을 끌려는 주변부의 꽃잎은 하얀 게 딱 계란이다. 어렸을 땐 이 꽃 이름을 몰라서 개망초가 아니라 계란꽃이라고 불렀다. 재밌는 건 이게 누구 눈에도 다 계란이었는지 얘 이름을 계란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꽃 이름에 ‘망하다’가 들어가고 ‘개’까지 붙어버려서 어감은 좋지 않지만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꽃이다. 개망초를 엮어 화환을 만들어서 머리에 쓰면 세상 어떤 왕관도 부럽지 않다.
손으로 비비면 박하 향 비슷한 강렬한 냄새가 묻어나는 배초향도, 어두워지면 잎을 축 늘어트려 접고 자는 괭이밥도, 아마도 강아지풀일 벼과식물과, 결국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때 되면 콩꼬투리를 보여주는 콩과식물도 전부 이곳을 빛내준다.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것만이 이들의 매력은 아니다. 이들은 생태계에서 꽤 큰 역할을 맡고 있다. 콩과식물은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뿌리에 고정하는 능력이 있어서 얘네가 머물다 간 자리의 토양은 비옥해진다. 냉이는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 영양분을 땅의 얕은 부분까지 끌어올린다. 쑥은 땅의 중금속을 흡수하고, 달개비는 습지의 오염된 수질과 토양을 정화한다.
좋아해서 꼬박꼬박 챙겨보던 웹툰에서 하루는 이런 대목이 나왔다. “근데 잡초는 꼭 제거해야 해요? 잡초나 꽃이나 같은 식물이잖아요. 홀로 핀 꽃만 고고하고 악착같이 자란 잡초는 나쁜 거예요? 예쁘지 않아서라면…” 하는 그 말에 할머니는 대답했다. “잡초를 제거하는 이유는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라오.”
네가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너는 남들을 방해하니까 그걸 눈 감아 줄 수는 없단다. 할머니의 그 칼 같은 판결이 나는 좀 가슴 아팠다. 사람이 선택한 특정 꽃에 영양분을 몰아주기 위해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지, 잡초가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해서 그 표독스러움 때문에 계속 자라도록 인간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얘네는 우리가 키우려고 했던 그 꽃들이 편식을 하고 간 자리에 앉아 남은 염류를 뽑아내고, 죽은 뒤에는 탄소 양분이 되어 자기네 뒤에 오는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여기를 잡초밭이라고 부르든 야생화 정원이라고 부르든 얘네의 본질이 보물인 건 변하지 않는다.
참! 이곳에서 찾은 보물 얘기를 하자면, 흰민들레를 빼놓을 수 없다. 민들레는 다 하얗지 않느냐고? 여기서 하얗다는 건 날아갈 준비가 된 솜 같은 씨앗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꽃 자체가 하얗다. 흰민들레는 우리가 흔히 보는 서양민들레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살던 토종 민들레다. 요새는 서양민들레만 지천이고 오히려 토종 민들레가 보기 어렵다던데 도대체 어디서 여기까지 날아온 건지 모르겠다. 여기, 3층인데. 내가 씨앗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귀한 몸의 행차에 씨앗을 채집해뒀다. 민들레 씨앗은 햇빛을 봐야 싹이 나기 때문에 너무 땅 깊숙이 묻으면 안 된다. 그래서 흙을 덮지 않고 살살 흩뿌리기만 했다. 씨앗 중 일부는 채집하자마자 바로 뿌렸고, 모아둔 씨앗 중 절반은 이듬해에 뿌렸다. 흰민들레 씨앗은 발아율이 높지 않다더니 정말로 아무도 싹을 틔우지 못했다. 모아둔 씨앗 중 나머지 절반은 한 번 더 도전해보겠다고 올해 파종했다. 그러나 역시 소식이 없었다.
나는 아쉬워하며 민들레를 기억 저편으로 미뤄뒀다. 그러던 어느 날 호들갑을 떨 일이 생겼다. 별생각 없이 상자를 들여다본 나는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왔다! 왔어! 흰민들레가 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흰민들레가 돌아왔어요!”
기가 막힌 건 흰민들레가 돌아온 화분이 내가 올해 씨앗을 심은 화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전 해에 쪼르륵 줄 맞춰 심었지만 아무도 발아하지 못했던 바로 그 텃밭 상자에서 민들레가 잔뜩 올라왔다. 흙을 뒤섞었는데 어떻게 줄을 맞춰서 등장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얘네가 그때 심은 그 애들이 아니고, 우연히 밖에서 날아들어 온 흰민들레가 정착할 때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오열을 맞추기로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정말 제멋대로다. 누구는 심어도 안 나오고, 누구는 안 심었는데도 나오고, 안 나오나 싶어서 기대를 접으면 그제야 나오고. 이곳에는 민들레처럼 어디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든, 옥상에 들렀다 가는 새들이 떨어트리든 계속 누군가가 온다. 일단 한 번 들어오면, 바로 싹을 틔울지, 한참을 잠자다 어느 날 싹을 틔울지는 순전히 씨앗 마음이다. 보는 쪽에서는 추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물이 들어있다는 건 알지만 나오기 전에는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이곳. 흙을 싹 다 버리고 새로 채워 넣는 것도, 흙을 소독하는 것도 아니라면 여기는 영원히 랜덤 박스인 채로 있을 것이다. 뭐, 어때. 삶에 미스터리한 기쁨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