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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좀비랜드의 철갑전차

텃밭 상자에 등장한 좀비가 사실 좀비가 아니었으니 정원에 평화가 찾아왔느냐? 아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좀비가 등장했다. 정원이 심어둔 나무만 덩그러니 있는 예쁘고 깔끔한 공간이라는 건 내가 정원 일을 안 해봐서 할 수 있었던 착각이었다. 예쁘고 깔끔한 건 멀리서 구경할 때나 그렇고, 몇 걸음만 가까이 다가가면 바글바글 난리도 아니다.


물을 알맞게 주고, 햇빛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두기만 하면 나무는 저절로 쑥쑥 크는 거 아닌가? 흙의 ph나 영양 상태도 중요하긴 하지만, 새 상토에 심은 나무들이라 아직은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보다. 미니사과나무에 진딧물이 생겨버렸다. “으악!” 그 말 밖에 안 나왔다. 내가 연두색을 싫어하게 될 줄 몰랐다. 초록 수집가가 되어 옥상에 숨 쉬는 초록을 잔뜩 데려다 놓고, 발아병에 걸려서 새싹의 형광 연두에 매료되었던 내가! 연두색은 새로 올라온 연한 잎의 색깔이기도 하지만 그 잎의 진액을 쪽 뽑아먹는 진딧물의 색깔이기도 했다.


진딧물 방재법을 찾아봤더니 마요네즈 탄 물 뿌리기, 퐁퐁 탄 물 뿌리기, 우유 뿌리기, 친환경 약재 뿌리기 등 선택지는 많았다. 하지만 농약을 칠 게 아니라면 뭘 뿌린대도 효과를 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먹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에 농약을 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빠르고 가장 구식인 수단을 택했다.


때때로 면봉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항상 손으로 돌아갔다. 장갑 낀 손으로 모든 잎을 훑고 또 훑었다. 나중에는 수행자처럼 머리를 비우고 무슨 경지에 빠져들었다. 생명체를 압사시키는 데 수행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게 끔찍하긴 하지만. 어떤 애들은 농익은 여드름 터지는 것처럼 ‘톡’ 소리가 났다. 윽. 미안하다.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대로 뒀다간 사과나무가 죽게 생겼어.


가드너에서 킬러로 보직이 변경됐다. 뭣도 모르는 어설픈 킬러였지만 사과나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진딧물이란 진딧물은 다 죽였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일조량이 많아지고, 날이 건조해지면 또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리고 일단 하나라도 나타났다면, 식물 전체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진딧물은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이 모두 가능한데, 무성생식만으로도 한 마리에서 수천 마리로 불어나는 건 일도 아니란다. 거기까지만 해도 무섭다. 그런데 유성생식으로 태어나는 진딧물은 날개 달린 애들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패배를 직감했다. 가뜩이나 번식력이 엄청난데 날개까지 단다면 정원을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다른 나무들에도 알을 낳아 놓을 게 뻔했다.


공포에 질린 사이 사과나무 한 그루에서 다른 사과나무 한 그루로 진딧물이 넘어갔고,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 몇 그루에서도 진딧물이 발견됐다.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야 해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킬러 업무를 하루라도 거르면 환공포증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연두색과 노란색의 점점점이 나뭇잎을 뒤덮었다. 그것도 꼭 새로 나온 연한 잎을 공략해서 아기 잎들이 시들시들 꼬부라져 갔다.




해가 뜨면 일은커녕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워지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진딧물을 잡았다. 하루는 진딧물을 잡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처음에는 옥상 땡볕에 잎이 탄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모과나무 여기저기 그런 잎이 많았고, 사과나무 두 그루에서도 병변이 보였다.


인터넷에 힘입은 돌팔이 가드너의 진단 결과는 붉은별무늬병(Cedar-apple rust). Rust? 어쩐지 녹슨 것처럼 보이더라니! 붉은별무늬병은 녹병균이라는 진균류에 의해 생기는 병이다. 향나무에서 기생하던 병균이 봄이 되면 포자 형태로 사과, 배, 모과 등의 나뭇잎 뒷면 기공으로 침입해 5월쯤 병변이 나타난다. 내가 본 갈색과 주황 얼룩이 바로 이것이었다.


여기서 병든 부분이 점점 커지고 부풀어 올라 6월에서 7월 무렵에는 털 모양의 녹포자기가 형성된다. 그게 터지면서 균이 향나무로 이동한다. 향나무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포자 형태로 사과, 배, 모과 등의 나뭇잎 뒷면 기공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모든 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녹병균은 이런 식으로 향나무와 사과나무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산다. 그리고 내 모과와 사과들은 주기적으로 병에 걸리겠지.


잎 뒷면에 녹포자기가 형성된 모습은 꽤 징그러웠다. 혈관이 굵직하게 튀어나온 성난 손발 사마귀처럼 보였다. 방재 방법이 반경 1km 안에 향나무 심지 않기와 전용 약재 살포라고 나오던데, 둘 다 내가 할 수 없는 방법이라 그냥 병변이 보이는 잎을 볼 때마다 열심히 제거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포자가 자라서 정원의 나무들끼리 서로를 감염시키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좀비랜드의 주역


누구는 새벽에 미라클 모닝을 한다는데, 나는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비척비척 옥상에 올라가 진딧물을 잡고 붉은별무늬병 증세를 보이는 나뭇잎을 떼줬다. 매일 일을 한다고 무슨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루라도 쉬면 다음 날 일감이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났다.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 나는, 아주 전형적인 진 빠지는 노동이었다.


나는 좀 두려웠다. 킬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뭘 죽이는 게 너무 손쉬워지는 것도. 그렇다고 나무를 제대로 살리는 건 또 아니라서 ‘내가 뭘 키울 수 있는 인간이긴 한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지난한 싸움을 질질 끌며 5월이 끝나갈 무렵 블루베리 잎에서 수상한 걸 발견했다. 여러 그루의 블루베리 나무 중에 혼자만 한 해 꽃을 안 피우고 넘어가기에 어디 아픈가 예의주시하던 애였다. 타원형의 작은 주황색 알갱이들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붉은별무늬병 녹포자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나?’였다.


포자가 자란 모습 사진 자료가 워낙 충격적이긴 했지. 그래도 금방 정신 차렸다. 녹병균은 장미과 애들에서 기생하는데, 내가 식물은 잘 몰라도 블루베리는 장미 친구 같아 보이지 않았다. 붉은별무늬병에 걸린 사과와 모과는 잎끝 라인이 뾰족뾰족하고, 잎이 얇고, 표면이 광택 없이 거칠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데 블루베리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잎끝 라인이 매끈하고 사과나 모과 잎의 표면처럼 까슬한 느낌도 없었다.


그다음에 든 생각은 ‘벌레 알인가?’였다. 그동안 정원에서 벌레는 많이 봤지만, 진딧물이 등장하기 전에는 살아 움직이는 애벌레를 굳이 잡아 죽인 적은 없었다. 잎을 너무 갉아대서 식물이 피폐해진다 싶으면 그제야 애벌레가 앉은 나뭇잎을 따서 떨어진 나뭇잎들 모아두는 통에 조용히 격리했지.


하지만 벌레알을 발견했을 때의 나는 진딧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면서도 진딧물 터트리는 꿈을 꿨다. 알이 여섯 개? 누군지는 몰라도 얘들이 바글바글 나와 형광 연두색의 연한 잎들을 갉갉갉 넝마로 만들 모습이 그려졌다. 너무 피로했다. ‘미안하다. 그렇게 놔둘 순 없어!’ 하고 비장하게 가위를 들어 잎을 싹둑. “으아악! 난 태어나지도 않은 애기들을 죽게 내버린 거야.” 하면서도 자른 잎을 잎 무더기 위에 살짝 얹어뒀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건 큰 실수였다.


주황 알 여섯 개를 내버린 날, 모과나무에 진딧물이 있는지 살펴보다가 특이하게 생긴 벌레를 발견했다. 위험한데 멋있는 느낌이었다. 철갑전차? 탱크? 거북선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시커먼데 주황색의 줄이 있어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얘는 ‘익충인지 해충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놔둔다’ 원칙을 지켰다. 그러길 잘했더라. 무당벌레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에 얘가 바로 무당벌레 애벌레라는 사실을 발견했거든.


귀한 무당벌레님! 요새 진딧물 늘어나는 속도가 느려진 이유가 다 있었다. 무당벌레 중에 육식성 무당벌레는 진딧물 천적으로 유명하다. 육식성 무당벌레는 대게 등에 광택이 돌고 초식성 무당벌레는 잔털이 있는지 등이 반질거리지 않아서 구분하기 쉽다. 육식성 무당벌레는 애고 어른이고 어마어마한 먹보라서 지나간 자리에 진딧물이 남아나질 않는다. 우리 정원에도 무당벌레는 자주 출몰한다. 노랑, 주황, 빨강, 색도 가지가지에 점이 없는 것부터 여러 개인 것까지. 가지각색의 무당벌레를 봤지만, 무당벌레 애벌레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문제는 무당벌레 자료를 읽다가 내가 살포시 내다 버린 게 무당벌레 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동네 산에 갔다가 거기 세워진 교육용 안내판을 보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게 무당벌레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제발 와주세요, 무당벌레님!” 노래를 불러 놓고, 정작 강림하신 분을 내다 버리다니! 그것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을!


집에 돌아오자마자 옥상으로 달려갔다. 잎 더미 위에 얹어둔 무당벌레알을 집어 도로 원래 자리에 앉혀놨다. 그나마 나뭇잎 버리는 통에 막 쑤셔 넣지 않고 살포시 얹어만 둬서 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걱정되어 옥상에 올라가 보니 무당벌레알이 붙은 잎이 비바람에 떨어져 있었다. 잎을 애초에 떼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행히 떨어진 잎은 화분 안에서 금방 발견했다. 더 다행히도 무당벌레가 뭘로 잎사귀에 알을 붙여놓은 건지 알들이 흐트러진 데 하나 없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알이 붙은 면이 흙을 향해 떨어졌는데도 알에 흙이 약간 묻었을 뿐 멀쩡해 보였다. 잎을 주워서 깊은 샬레처럼 생기고 위에 숨구멍이 붙은 곤충 채집 용기에 넣었다. 애들이 태어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려고.


알 부화는 3~4일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처음 발견한 날부터 세면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가서 ‘혹시 내가 잎을 떼어 버려서 부화를 못 하나?’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부화 전에 알이 검게 변한다는데 얘는 여전히 노랑과 주황의 경계에 있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몇 주 같은 며칠이 지났다. 거의 포기할 무렵, 드디어 애벌레가 태어나는 걸 봤다. 알 안에 검은 눈과 몸의 표면이 반투명하게 보이는 게 ‘제발 안 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일어난 착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이파리 채 들고 호다닥 뛰어서 원래 발견했던 자리에 풀어주고 왔다.


태어나는 중인 애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왜 먹을 것도 없는 데다가 알을 낳았지?’ 블루베리는 정말 속을 안 썩인 나무였기 때문이다. 블루베리에는 진딧물이 낀 적이 없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고 그냥 없겠거니 했는데. 다시 돌아가서 무당벌레알이 있던 자리 근처의 잎을 몇 장 뒤집어 보니 있더라고, 진딧물이. 우리 옥상 여기저기서 무당벌레가 종종 발견되더라니 진딧물이 많은 줄 알고 식사하러 왔었구나. 자리 좋은 데는 아기들을 위해 맡아놓기까지 하고.


무당벌레의 한살이


킬러는 그제야 장갑을 벗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뭘 죽이는 게 쉬운 일일 수가 없다니까. 잡초 뿌리 뽑으면서도 느꼈는데, 저 위에 계신 분들의 생명력은 내 노동력으로 따라잡기 쉽지 않다.


그 이후로도 진딧물이 너무 많은 날이면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진딧물이라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들지는 않았다. 달콤하고 연한 이파리가 있으니 진딧물이 왔고, 진딧물이 있으니 먹보 무당벌레도 오는 거구나. 다들 어디서 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먹을 게 있는 곳으로 오긴 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내가 훌륭한 킬러가 아니고, 훌륭한 가드너는 더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균형은 얼추 맞춰지겠거니 생각할 수 있었다. 다음 해도 날이 따뜻해지면 어김없이 진딧물이 나타날 텐데, 연두 노랑 점점점에 지레 겁먹기 전에 내가 이걸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미친 킬러까지는 안 가고 게으른 킬러 정도에서 멈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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