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만 하다 퇴근합니다
점심시간, 의자에 앉기도 전에 동료의 한탄이 시작됐다.
“아니.. 팀장님.. PPT로 보고할 때 피드백 얼마나 주세요?
이미 보고했던 건인데 한 장 한 장 넘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매 장에서 피드백을 10분씩 준다니까요?”
들어보니, 이미 한 번 끝난 안건을 정리해 다시 보고한 자리였다.
그런데도 갑자기 말을 바꾸며 이유를 따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듣던 나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과거의 내가 떠올라서다.
품의서를 50번 넘게 수정했던 적이 있다.
광고 배너 디자인? 17번 바꿨다.
품의서엔 아직 내용도 안 정해졌는데 “일단 올려줘” 하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내용이 바뀌었다.
내용이 바뀌면 금액도 바뀌고,
금액이 바뀌면 어카운트 시스템 연동도 다시 해야 하니
그건 단순 텍스트 수정이 아니었다.
내 2주는 그렇게 소모됐다.
디자인 기획안 수정할 때는
“미안한데~”라는 말과 함께 문장 끝 온점을 넣었다 뺐다,
글씨를 왼쪽으로 옮겼다 말았다.
아무 의미 없는 지시가 줄을 이었다.
디자이너에게 그걸 다 전달하는 건 내 몫이라
나는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언론홍보로 진행된 기사도 바꿔달라고 했다.
기자에게 연락해 수정 요청을 하란다.
그 수정이 뭐였냐고? 제품 이름 띄어쓰기.
물론 제품명은 중요하지만.. 이미 배포된 기사에,
정보 오류도 아닌 띄어쓰기를 고치자고?
결국 빌면서 수정요청을 해야 하는 직원만 바보가 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행동을 하면서도 그가 스스로를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는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요구한 수정 대부분은
기억력 퇴화, 판단 미스, 통찰력 부족, 그리고 ‘확신 없음’에서 나온
불필요한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팀원들 하나둘 넉다운되기 시작했다.
일의 동기도, 자신감도, 능동성도 전부 사라졌다.
“레시피는 정하고 끓이셔야죠.
계속 맛보고 바꾸다 보면, 결국 다 태워먹습니다.”
지시가 애매하면 책임도 흐려지고,
책임이 흐려지면 결국 마음이 무너집니다.
수십 번의 수정 끝에 남는 건
완벽한 결과가 아니라
지친 사람 한 명일 뿐입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 탓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하세요.
당신이 떠안고 있는 건 책임이 아니라,
리더의 우유부단입니다.
기준이 바뀔 땐, 기준을 다시 정해달라고 말하세요.
당신은 지시를 따르고 있는 중이지,
혼란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