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 참 아팠어요.
그러니 상처주지는 말아주세요.
1. 남들도 그만큼의 산만함은 다 있어.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너무 유난 떨지 마.
-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근데 그게 일할 때나 일상생활할 때도 다른 사람들한테 반복적으로 지적받는 정도인가요? 만약 그 정도가 아닌데 그렇게 쉽게 얘기하시는 거라면, 당신의 산만함은 우리만큼 병적이진 않은 거예요. 그러니 적당한 범주 내에서의 산만함을 가지고 건강하게 태어난 걸 부모님께 평생 감사하게 생각하고 사셨으면 좋겠어요. ADHD 환자로서의 삶, 다음번에도 또 살래?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전 절대 다음 생은 ADHD 환자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말할 거예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너무 힘들거든요.
2. 약에 의존하지 말고 노력을 해, 노력을.
-노력이라.. 저도 노력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선 다 해 봤어요. 근데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약을 안 먹게 되면, 누가 내 뇌를 빼간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멍해지는 거예요. 뭐부터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려면 뇌에서 일정량과 일정 농도의 호르몬이 나와야 돼요. 근데, 약을 안 먹으면 우리는 그게 안 나와요. 그래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예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약을 먹고 삶의 질을 높이실래요, 아님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약을 끊고 멍한 상태로 매일매일 그렇게 삶을 이어가실래요? 전, 삶의 질을 높이고 지금보다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약 먹기를 선택한 거예요.
3. 정신과 약 오래 복용하면 눈 풀리고 이상해 진대. 네가 약 오래 먹어서 중독될까 봐 걱정돼.
-환자 아닌 사람들이 약 먹으면 그럴 수도 있겠죠. 멀쩡하던 사람이 모르핀 같은 마약류의 약을 먹었다면요. 근데 그거 아세요? 말기 암환자들한테는 모르핀을 진통제로 쓴다는 거요. 우리는요, 마약에 취해서 살아가는 마약쟁이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약을 먹어야 다른 사람들처럼 전두엽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랑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호르몬이 조절되고 정상적으로 꾸준하게 분비가 돼요. 그게 안 되면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일상생활조차도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일반인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 일에 빠져서 허우적대게 되더라고요. 되게 힘든데, 주변에선 그걸 보면서 비웃어요. 저런 것도 못 하냐고. 쟤 바보 아니냐고요.
4. 이제는 약 끊고 정상인들처럼 살아야지.
-저도 약 안 먹고 살아보려고 했죠. 그래서 1년 동안 약 안 먹고 버텼어요. 근데 정말이지 너무 힘들더라고요. 기본적인 습관 하나를 들이는 것 마저도요. 그리고 정상인이라는 말도 사실 저에겐 좀 불편하니 일반인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볼게요. '일반인의 삶'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각의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만약 일반인의 삶을 약 안 먹는 것 하나에만 포커스를 맞춰서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 일반인으로 보일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 때 나와야 하는 호르몬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때로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있고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매번 불편해한다면 그 사람을 온전하게 일반인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럼 기준을 좀 다르게 잡아보죠. 일상생활을 무리없이 하면서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것으로요. 그러려면 일반적으로 ADHD 환자들은 약을 먹어야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렇게 약을 먹고서라도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한다면 그게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인의 삶의 범주에 가깝지 않을까요?
약을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대로, 먹지 않는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거예요. 그 사람의 인생을 당신이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라면 당신만의 잣대를 우리한테 들이대면서 "너넨 틀렸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당신이 던진 그 한 마디가, 저 같은 사람들한테는 비수가 돼서 꽂히거든요. 그런 말, 진짜 아프고 오래 남아요.
5. 팩폭 하나 해줄까? 못 하는 게 아니라 네가 게을러서 안 하는 거야.
-상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은 팩폭이라기 보단 막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 막말을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어요.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비난할 시간이 있으시다면 ADHD와 관련된 책 한 권이라도 읽고, 한 시간짜리 다큐 영상이라도 하나 보고 오세요. 이게 만약 힘들다면, 성인 ADHD와 관련해서 정신과 전문의들이 만든 단 3분짜리 영상이라도 보고 오세요. 무지에서 나오는 막말은 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공감도 도움도 안 되거든요.
6. 노력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지?
-저도 이게 핑계였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는 역량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크게 차이가 나요. 그리고 거기서 또 패배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죠. 다른 일을 하더라도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죠. 그게 우리를쉽게 절망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고요. 그런 악순환이 장기간 무한 반복되는 거예요. 그게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나는 패배자야'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죠. 세상에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잘하면 사람들한테도 많이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니까 저도 좋죠. 마음은 정말 잘하고 싶은데 어느새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어요. 또 저 혼자 뒤처져 있더라고요. 그럴 땐 정말 자괴감이 몰려옵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싶어서요.
7. 사람이 달라지려는 의지가 있어야지. 근데 넌 의지가 없잖아.
- 아니요. 생각하고 계시는 거랑은 다르게 의지는 오히려 넘쳐요. 왜냐면 그동안 우리는 남들이 너무 쉽게 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게 해왔거든요. 그런 만큼 시행착오와 실패를 워낙 많이 겪어서 정말 작은 거라도 성공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요. 근데 지속화, 체계화, 조직화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가 엄두가 안 나요. 멍하거든요. 설령 어떤 걸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런 이유 때문에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죠.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도 남들의 몇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하고요. 뭔가 결과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허들이 너무 높아서 제 풀에 지쳐 쓰러지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의지가 없는 게 아닙니다.
8. 약쟁이 주제에.
-제가 아는 약쟁이의 개념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먹어선 안 될 히로뽕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을 먹고 그 약에 휘둘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고,스스로 인생을 망치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약쟁이 맞죠. 그러니까 법적으로 처벌까지 받는 거겠죠.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비난받아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병들고 썩게 하니까요. 근데 자기 인생 잘 살아 보려고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의사 처방받고 지시에 따라 약을 먹는 사람들이 왜 약쟁이라 불리고 남들의 손가락질이나 험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병이 왜 남들의 술자리 안줏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기라도 했나요? 아니면 교도소에 갈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약물 오남용 자와 치료를 목적으로 약을 먹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정립해 주세요.
9. 나 그때 정말 힘들어서 정신과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니까. 근데, 다행히 정신과까진 안 갔어.
-이 아프면 치과 가죠? 귀나 코에 문제 생기면 이비인후과 가고요. 피부에 뾰루지 하나라도 나면 피부과는 달려가잖아요. 그럼 정신적으로 힘들면 정신과 가서 상담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정신과 가는 게 최후의 방법인 것처럼 얘기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 건강하게 살아보려고 병원 다니는 건데, 저는 못 갈 곳에 가는 건가요?
10. 꼭 이겨낼(극복할) 수 있을 거야. 힘내!
-이건 이겨낼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드물게 수영 천재 펠프스처럼 약을 안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근데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죠. 약을 안 먹고 생활한다 하더라도 주의력 결핍이나 충동성, 과잉행동 이런 ADHD의 기본적 성향은 나타납니다. 성인 ADHD는 아동 ADHD과는 다르게 완치의 개념이 없는 병이거든요. 그냥 자의적으로 치료를 중단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죠. 그 말인즉슨, 앞으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 병과 함께 살아가야 간다는 뜻이에요. 특히나 성인이 되고 나서 판정을 받았다면요. 상부상조하면서 좋든 싫든 간에 이 녀석이랑 한 몸이 되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제가 이 병을 이겨내려고 약 안 먹고 1년간 버티다가 나중에 그게 오히려 강박으로 작용해서 우울증까지 추가 처방까지 받은 걸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시려나요. 차라리 "필요하다면 약을 먹으면서 이러저러한 책을 읽어보는 건 어때? 아님 이런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 너한테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정말 진심으로 저를 위하는 조언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혹시라도 주변에 저 말고 다른 ADHD 환자를 만나게 되면 위에 나온 말들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에 적은 글들 중에서는 제가 직접 들었던 말도 있고요, 다른 환자 분들이 듣고 나서 속상해했던 말도 있어요. 사실 저것보다 더 많은데 줄이고 줄인 거예요. 에이앱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루트를 통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분들한테도 물어봤던 내용을 토대로 쓴 글이거든요. 근데 아마 환자분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실 거예요. 거의 대부분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들은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것도 오랜 시간.
ADHD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동안 난감하셨던 분들께는 오늘 제가 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글을 혹시나 ADHD 환자 분들이 읽으신다면, 조금이나마 여러분들께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