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강점? 말해 뭐해!

말과 글을 다루는 능력이지~

by 그럼에도불구하고

정말 잘하는 일을 꼽자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일이 있다. 이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종교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원래 남들 앞에서 종교와 관련된 얘기를 하는 걸 좀 꺼리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혹시나 구독자님들이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이번만은 감안해 주셨으면 좋겠다.

때는 바야흐로 2015년. 성당 풍물패 활동을 하다 우연히 풍물패 회식 자리에 가서 신부님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가톨릭 세계 청년대회(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이 3년에 한 번씩 모여서 즐기는 글로벌 축제)가 이듬해 2016년, 폴란드의 크라쿠프라는 도시에서 열리게 됐는데, 주변에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폴란드는 구소련 연방국가 중 하나였기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부님은 갑작스럽게 폴란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폴란드어...? 옛날에 독일 식민지였던 그 폴란드? 오호, 그거 재밌겠는데? 남들이 하지 않는 특이한 언어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내 스펙에도 플러스가 될 것 같은데, 이참에 한 번 배워 봐?’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신부님을 설득하고 있었다.

“신부님, 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원래 외국어를 좀 빨리 배우긴 하거든요. 혹시 신부님께서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부터 미리 폴란드어를 공부해도 될까요? 어차피 아직 1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대신 그럼 참가비는 전액 지원해 줄게. 미리 공부 좀 해줘. 전문적인 수준까지는 바라지 않고, 그냥 일상생활하면서 의사소통에 문제없을 정도면 될 것 같아.”
“아싸! 진짜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배워볼게요!”


어느 정도 열심히 성당을 다니는 가톨릭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어 한다는 세계 청년대회.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도 돈을 들이지 않고 40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을 전액 지원받아서 간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신이 났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았다. 폴란드어와 관련된 책을 찾기 위해서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없었다. 인천 시내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찾은 폴란드어책은 열 권 남짓. 그것도 음성 자료는 하나도 없는 그냥 순수 서적들. 영어는 원어민이라도 찾기 쉽지. 폴란드어 원어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책을 보니 눈에 들어오는 철자들은 어디선 한 번쯤 본 듯하면서도 왜 그리도 낯선지. 그중 몇몇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소리를 글로만 옮겨놓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언어 공부할 때 유난히 발음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시간 투자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그런 상황에서 음성 자료도 없이 책만 갖고 공부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싶었다.

그래서 그 나라 발음을 듣고 공부할 수 있는 어학 프로그램을 구매했다. 처음엔 다른 나라 언어를 배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까막눈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따라 하면서 감을 익혀 나갔다. ‘아, 이 알파벳에서는 이런 소리가 난다는 거지? 미세하지만 좀 다르긴 하네. 어쨌든, 차이는 알 것 같다. 대신 여기서 이 부분만 좀 더 주의하면 되겠는데?’ 그동안 외국어를 공부할 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중얼중얼 대며 배운 소리를 최대한 똑같이 따라 했다. 외국인 성우의 성대모사를 한다는 느낌으로. 직접 입으로 발음해보면서 혀의 위치 등을 감각으로 익혔다. 이런 소리를 내려면 혀의 위치는 여기다 둬야 하고, 성대는 마찰을 시켜야 하는구나를 연구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단순한 문장을 반복해서 따라 하다 보니, 문장 구조와 문법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생기니까 신났다. 색깔에 대해 배운 날에는 눈에 보이는 온갖 것의 색깔을 대입하면서 이건 니에비에스키(파란색), 저건 쥐엘로네(녹색), 쥬우떼(노란색) 이런 식으로 복습을 했고, 동물 이름을 배운 날에는 알고 있는 온갖 동물을 떠올리며 복습을 했다. 중간에 하다 말다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부를 게을리하면 같이 가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 같아서 항상 긴장하면서 공부했다. 입으로만 익히기에는 휘발성인 내 기억력을 못 믿겠어서, 영상에서 나오는 모든 문장을 기록하고 반복해서 읽고 눈에 익숙해지게 만든 뒤 통째로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볼일이 있어서 체코로 일주일 먼저 들어가 후발대랑 만나기로 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1년 동안 배운 폴란드어로 말했을 때, 그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 의사소통을 위해서 해야 하는 말은 어느 정도 했고, 그 사람들이 폴란드어로 하는 얘기도 듣다 보면 이런 얘기를 하고 있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웬 동양 여자가 “엄마, 이거 얼마예요?” “아,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1년 동안 여기 오려고 혼자 폴란드어 공부했어요.”라고 폴란드어로 얘기하고 자기가 말하는 걸 알아듣는 게 신기해 보였는지, 성지순례를 가서 만난 노점상 할머니는 함께 데려간 조원들에게도 선물을 하나씩 주셨다. 아싸 득템!

리브닉이라는 시골마을에서 머무를 때, 홈스테이 할머니가 커피숍에 데려가서 커피며 케이크를 이것저것 막 사주셨는데, 할머니한테 “할머니, 괜찮아요. 다 못 먹어요. 필요 없어요.”라고 얘기했더니, 점원 아주머니가 ‘으잉? 쟤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곤 했다. 성당에서 신자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만들어준 감자요리가 너무 맛있었는데 하도 영어 및 폴란드어 통역을 하느라 무리했는지 입병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남기면서 말했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 입에 병 나서 먹을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그걸 들은 폴란드 사람들은 씩 웃으면서 괜찮다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처음으로 배운 슬라브어였고, 물론 독학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언어적으로 타고난 감각이 있다는 걸. 한 폴란드 친구가 그랬다. 자기도 폴란드 사람이지만, 폴란드어가 절대로 혼자 공부하기 쉬운 언어는 아니라고. 근데 1년 공부했는데 자기들과 의사소통이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하긴 뭐 되니까 하는 거긴 하지만, 나도 내가 신기한데 오죽하겠어.

이런 재능을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고 싶다. 언어를 통해서 그 나라의 문화를 읽어나가는 것.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의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 그게 외국어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나서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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