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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Jul 23. 2021

트라우마에 맞서는 시작 1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 1

요즘의 나에게 새로운 계기가 생겼다.


어떠한 계기로, 한두달간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새로운 삶을 하나둘씩 경험하고

세상구경을 갓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이혼을 한 후,

내 목숨보다 귀한 내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행복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행복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난 행복하기 위해 이혼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온전히 살기위해, 덜 불행하기 위해 선택한 결정이었다.

이런 내가 행복하게 웃고 좋은생활을 즐기는 것은 아이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내가 일부러 불행하려 하지 않아도,

나는 매일같이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 깊이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버티지 못한 정상적이지 않은 그 사람들 속에,

나 하나 목숨부지 하겠다고

내 아이를 그 집 안에 두고 나온것에 대한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아이를 내가 데리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법조인 시아버지와 법조인 남편은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그들에게는 내 아이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긴 연애 끝에 결혼한 시동생네는,

년도 되지 않아 동서가 이 집안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도망쳤다.

시동생은 정신적으로 긴 기간 문제가 있어왔고, 학업적으로도 남편만큼 우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엄청난 시어머니와 방관자인 시아버지의 조합은 얼마나 지옥이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좋은 학벌을 가진 남편과 나의 조합인 내 아들은

시부모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자 유전적으로 최고의 조합이었기에,

그들은 절대로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평생 봐야했고,

내 아이의 정서를 위해서

내 아이에겐 아빠와 시부모가 좋은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랬다.

소송을 가게되면, 도저히 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좋은말들을 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매주 일주일마다 한번 1박2일 아이와 만나고,

재산분할과 위자료를 받지 않는 대신 양육비를 따로 주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남편은, 위자료를 내는 쪽이 이혼의 귀책사유로 서류상 남는다는 이유로 위자료를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재산분할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명의의 재산을 시부모 명의로 돌려두었다.


그렇게도 잔인한 사람이었다.



물론 내겐 많은 증거들이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시어머니에 대한 증거도,

남편의 행태에 대한 여러 증거도,

양육권을 갖고자 하면 어떻게든 가질수는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남편의 지인분들 조차 내게 따로 연락이 오셔서 "걔가 애 키우면 안된다. 애는 무슨일이 있어도 너가 데리고 가야한다. 너가 키워야 바로 큰다" 며 법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연락도 해왔다.

내 변호사도, 이것은 무조건 100프로 양육권을 가져올 수 있으니 소송진행을 하자고 했다.

법조인인 시부와 같은 법조인남편은 사회적 체면이 가장 중요하기에 소송을 가장 두려워하고, 그렇기에 소송 전에 나의 소송의지를 꺾으려고 그렇게 밟아대는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양육권에 대한 확신을 못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너무도 잘 아는 내가, 아이아빠에게 양육권을 주는것을 차마 결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매일 고민한다.

여러 증거들을 갖고 양육권 소송을 해서 내가 아이를 데려오는것이 맞는것인지,

주 1회 1박2일로 아이를 만나며 양육권을 포기하는것이 맞는것인지,

어떻게 해야 아이의 정신적 타격이 덜 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내 아이가 상처를 덜 받을지,

어떻게 해야 내 아이가 밝게 웃을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


내가 데려와서 직접 키우는 것이

매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나은 것일까.

그들의 좋은 경제적 환경은 아이의 교육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정신적 정서적 환경은 아이에게 너무나 치명적이다.


항상 고민하지만,

하루하루 확신하는 나의 믿음이 있다.

지금은 매주 만나고, 조금 더 크면 격주에 한번 만나더라도,

아이는 내 진심과 사랑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반을 자르는 것을 포기한 솔로몬의 재판 일화처럼, 나는 아이의 양육권을 우선적으로 포기하기로 했다.

서로간 생채기를 내면서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다보면, 결국 내 아이가 다친다.

왜 엄마가 소송을 피하고 양육권을 포기했는지, 이 마음이 어떤 그림의 사랑인지, 알아줄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아이를 못보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나도 이렇게 조용히 고민하고 양보하지는 않을것임이 확실하다.


아이는 하나의 인격체이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언젠가는 모든 사실을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아이아빠가 좋은사람이라고, 친할머니가 좋은사람이라고 아이에게 말해주어도, 아이가 판단하는 날이 오겠지.


그것은 아이의 몫이다.

나는 엄마로서 기다려줄 뿐.

양육권과 상관없이 언젠가 아이가 엄마와 살겠다고 제 발로 날 찾아왔을 때,

1초의 망설임 없이 아이를 안아주고 받아들여주는 엄마가 되기위해, 나는 매일 최선을 다하고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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