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처럼 찍혀서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봉선사 서쪽 끝 건물인 선열당 툇마루에서 생애 처음 그림을 보고 감동받았다. 절집 족보로 사숙되는 명고 스님은 느닷없이 내게 팔대산인 그림을 보며 감상을 물었다. 도록을 열자마다, 둔기로 맞은 듯한 감동을 느꼈다. 명고 스님은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 옛날 사람들은 좋아하는 그림으로 점을 친다고 하던데, 스님도 팔대산인 그림 좋아하는 거 보니 얌전하게 중노릇 하기는 어렵겠는걸. 어떤 그림이 제일 좋은지 하나 골라봐. 내가 그림점을 쳐주도록 하지"
뭘 골라야 할까 책장을 뒤척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 그럼 저 고르는 동안 먼저 스님 좋아하시는 그림부터 말해주세요?”
“나? 나는 선승이니까 팔팔조. 외다리 정진하는 모습이 좋아. 불철주야 오매불망 ”
그가 고른 그림은 고요했다. 바위 위에 검은 까마귀가 눈을 감은채 외다리로 깊은 선정에 잠겨 있었다. 세상일에 초연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부처님 열반 후 제자들이 모여 경전을 결집할 때,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음에도 견성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이에 아난은 7일 동안 외다리로 정진해서 견성했다고 한다. 일생을 선방에서 정진해온 수좌다웠다.
내가 고른 그림은 물고기 그림이었다. 유유히 강물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자태와 기상이 좋았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 섭사(涉事)라는 글씨와 낙관이 찍혀 있었다.
“ 이거 쏘가리 눈매가 사나운 걸. 섭사(涉事)라. 이섭대천(利涉大川 : 큰 물을 건너는 게 이롭다.)이구만. 풍파가 많겠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영락없는 운수 지명이군. 좋아하는 그림을 정했으니 화제(畵題)도 하나 지어 봐. ”
나는 대뜸 “활어역수 사어유수 (活漁逆水 死魚流水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스르고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 간다)”고 적었다. 세상살이란 한 군데에서 한 군데로 옮겨 가는 것을 터였다. 나는 기왕이면 물보라를 헤치면서 세상을 건너고 싶었다.
“ 어이쿠 역적지상이로세. 중 노릇 안 했으면 여러 놈 두드려 잡았겠어 허허허”
그때 나는 갓서른이나 되었을까? 그는 아마 40을 살짝 넘었던 것 같다. 라일락이 피었던, 세상에서 처음 그림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날이었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위안하는 재료는 되겠지만, 사람을 설득하거나 세상을 바꾸는 재료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슈베르트의 숭어가 오역이란 건 많은 음악가들이 알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숭어를 ‘송어’로 바꾸려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귀국한 뒤 사람들에게 슈베르트의 숭어를 송어로 고치자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거 바꾸면 뭐하냐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더 좋은 세상은 느낌과 주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변화로 인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국회의원, 시민단체 대들은 세상에 대한 총괄적 의견은 풍부하지만 구체적인 각론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벽돌 한 장한 장이 모여서 튼튼한 벽이 되듯이,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는 일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에 도달한 뒤, 더 이상 누구의 도움을 얻거나 부탁을 통해 ‘구체적 현실’을 바꾸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복력(福力)이 충분하지 않은 까닭에 나는 아무리 노력해야 ‘ 구체적 현실’을 바로 잡을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실 입으로는 개혁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세상을 1mm도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다.
그 대신 더 이상 그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직접 교육부와 승부했다. 교육부에 직접 진정서를 내고, 교과부 공무원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즉각적으로 교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교과부가 과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행정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민원제기 후 교과부 직원과 전화통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공무원은 처음에는 좀 귀찮은 듯이 형식적으로 내게 말했다.
스님, 슈베르트 숭어나 송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걸 꼭 그렇게 바꿔야 되나요?
틀린 거는 당연히 바꿔야죠. 베토벤과 베트맨이 같은 건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러네요
그가 내 말을 듣고 웃었고 나도 웃었다.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성공’을 예감했다. 교과부 직원에 내 말을 수용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며칠 뒤 나는 교과부로부터 한 장의 공문을 받았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 중인 음악 교과서를 조사해본 결과, 중학교 2학년 음악교과서 2종, 고등학교 음악교과서 4종에서 오류사항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류가 발견된 6종의 교과서는 7차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교과서로 2010년 사용기한이 만료됩니다. 2011년 각급 학교에 적용될 음악교과서에는 ‘송어’로 정확하게 표기할 계획입니다.”
교과부는 슈베르트의 ‘숭어’를 ‘송어’로 고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MBC 뉴스를 비롯해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보도해 주었다. 성공이었다.
명고 스님은 절집 족보로는 사숙이지만 그는 언제나 나의 스승이고 형이었다. 그는 참선정진을 경책하고 지도해 주었으며, 서화(書畫)에 대한 혜안과 서책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다. 멀리 외국에 갈 때면 어려운 쌈짓돈을 털어 여비에 보태주었을 뿐만 아니라 악독한 승려들을 내가 혼내줄 때면 언제나 내 편에 서서 응원해준 후원자였다. 내가 흥국사 탱화를 훔쳐가 도둑 승려를 색출해 낸 사건으로 봉선사를 떠나게 되었을 때도 환하게 웃으며 위로해 주고 지켜주었던 것도 그였다. 그가 모함을 받아 상심으로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난 것도 어쩌면 나와 친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송어를 들을 때면, 명고 스님과 툇마루에 앉아 있던 젊은 날을 생각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라고, 나는 살면서 세상을 거스를 거라고 팔대산인 그림을 보면서 당당히 말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날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 때마다 명고 스님은 나를 언제나 응원해 주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봉선사 주지 일◯스님이 명고 스님에게 봉선사를 떠나라고 했다고, 무엇보다도 모함을 견디는 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부음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울었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그가 생각난다. 그의 억울함을 위해 한마디 변명도 해주지 못하고 그를 보낸 나의 무능함이 미안스럽기만 하다. 권력이 무서워 그를 지켜주지 못했던 그와 나의 동료들이 야속하기만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팔대산인 그림과 내가 그에게 했던 고백들을 떠올리곤 한다.
산다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다.
지금도 나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슈베르트의 송어는 팔대산인 그림을 보여주었던 명고 스님에게 바치는 나의 헌정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