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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문 Oct 29. 2022

통곡의 벽에 가 보고 싶다.

램브란트, 탄식하는 예레미야의 침묵

통곡의 벽에 가 보고 싶다. -탄식하는 예레미야의 침묵


[ 1h Repeat ] 바흐(Bach) _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Cantata No140 /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645) - YouTube


바흐를 만났던 날의 떨림을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가을 깊은 밤이었다. 1시나 2시쯤이었던 것 같다. 잠을 쫓아 보려고 삼성 워크맨 ‘MYMY’에 헤드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성문 종합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인간세상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음악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절제되고 조화로웠다. 그건 기쁨과 슬픔이 없는 세계, 헝클어진 복잡함을 버리고 하나로 모든 것이 어우러진 세상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어두운 밤바다를 운항하는 함선을 이끌어 주는 등대빛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손에 쥐었던 볼펜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음악을 들었다. 바흐의 칸타타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라는 곡이라고 DJ가 말했다. 나는 그 곡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성문 종합 영어책에 적어 놓았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실제 연주를 꼭 한번 들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흐를 만나던 그 순간, 내가 읽던 성문 종합 영어의 지문은 우연히도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문 종합 영어
“유대인들이 주로 생선장수나 과일장수를 하거나 보석상을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언제든지 나라로 돌아오라는 요구를 받게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갑작스러운 출발에 가능한 손실을 적게 보려는 본능적인 바람 때문에 다이아몬드처럼 개인적으로 수송하기에 쉬운 것을 선택하거나 매일 매일 없어지고 새로나는 과일이나 생선같은 것 그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 예를들면 카페트같은 고급깔개 보다는 펑범한 깔개를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나는 유대인의 피를 타고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해 안에 나 역시 예루살렘에서 부르는 것을 듣는 대로 순종할 준비가 되 있기를 바랍니다.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이 긴 여행울 준비하기 쉽습니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보곤 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위해 준비하는 삶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귓가에 바흐의 칸타타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나도 언젠가 한번 꼭 예루살렘에 가보고 싶었다.


거리에서 이 작은 책을 펼치고 나서 겨우 처음 몇 줄을 읽어 보고 다시 덮고는 가슴에 꼭 끌어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 방에까지 달려왔던 그날 저녁으로. 그리고 나는 아무런 마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
 - 알베르 카뮈의 서문


서문을 읽다가 구매욕에 사로잡히는 책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는 쟝 그르니에 ‘섬' 서문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까뮈가 부러워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나는 가슴이 달아올라 ‘쟝 그르니에’의 책을 사서, 한달음에 읽었다. 서정적 감성이 흐르는 문체의 아름다움은 특별할지 몰라도 무슨 인상을 받을 만큼의 감동은 아니었다. 다만 ‘침묵을 완전히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은 램브란트뿐’이란 구절만은 나에게 뚜렷한 기억을 남겼다. 그건 침묵에 대한 존경과 램브란트 그림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Self-Portrait. Rembrandt, Dutch, 1660.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어떤 정열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속에는 엄청난 침묵이 찾아든다. 그 침묵을 완전히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은 렘브란트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순간의 일 초 뒤에는 또 삶이 다시 계속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이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에 매인 채 정지하고 있다. 무엇에? 나는 모른다. 그 침묵 속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다. 그 침묵은 소리나 감동의 부재가 아니다 
- 쟝 그르니에 ‘섬’에서


그 후 램브란트 그림을 볼 때마다 ‘침묵’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램브란트에 나타난 침묵에 대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물론 램브란트를 전혀 모르겠다는 취지는 아니다. 나의 의문은 이를테면, 동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베르’나 ‘프란츠 할스’에게는 없는, 램브란트에게만 나타났던 침묵이 무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쟝 그르니에가 램브란트 그림에서 보았다는 ‘삶이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에 매인 채 정지하는 순간’을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기형도, ‘빈집’ 중


사랑을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동공이 풀린 눈은 현실이 아닌 먼 곳을 잃은 채 죽음을 찬미한다. 인간세상의 어떤 것도 그를 위로하지 못한다. 그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어느 쪽인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그는 미래를 향해 걷지 못한다. 시간은 정지하고 맥 빠진 모습으로 마지못해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입을 닫는다. 무엇을 전할지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함락에 탄식하는 예레미야(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Rembrandt, 1630.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램브란트의 그림에서 나도 “어떤 정열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속에 찾아든 엄청난 침묵”을 보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좌절에 빠진 선지자 예레미야를 그린 그림에서였다. 그는 자신이 평생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얼굴로 침묵에 빠져 있다. 그의 왼쪽에는 금은보화가 무의미하게 팽게 처져 있고, 오른쪽 너머로 예루살렘의 성벽이 불타고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도망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빌론에 의해 유대의 왕국이 멸망하던 날의 모습이다. 스스로의 과오와 불운. 되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로 그는 침묵에 빠져 있다. 격정이 도를 넘어 더 이상 타오를 것 없이 사그라진 잿더미로 변해버린 침묵이다. 더 이상의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비탄이 그림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이며,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 모든 것을 잃고 울부짖던 욥이다. 그리고 연인을 빼앗긴 남자의 얼굴이다. 예례미야는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날의 통곡을 ‘애가(哀歌)’란 이름으로 남겼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 예레미야 애가 1장 1절


통곡의 벽, 유대인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출전 위키백과)


예루살렘을 찾은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 간다고 한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에 서서 울었다고 한다. 2천 년 전 그날을 생각하며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운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의 슬픔을 적었던 예례미야의 애가를 읽는다고 한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 위대했던 고대의 영광을 증언하는 그 벽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세월을 넘어 영원히 그 자리에 서있는 그 벽에 서면, 2천 년의 그날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릴 때 내가 읽었던 ‘성문 종합 영어의 지문’처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면, 그들을 부르고 있는 소리의 정체는 ‘통곡의 벽에서 울부짖던 그날’의 아픔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자다가 창호지가 우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웃풍이 심해서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입김이 불어 나오는 구들방이었다. 절에는 아무도 없었고, 매서운 바람에 ‘우웅 우웅’하고 소나무 가지들도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영하의 추위를 막느라 바람에 구멍이 나서 떨고 있었던 창호지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날 나는 김광규의 밤눈이란 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 김광규 밤눈


젊은 시절의 나는 누군가 나의 벽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찬바람을 벽이 되어 막아주기를 바랐다. 어둠을 틈타 내 것을 부정하게 탐하는 도적들로부터 튼튼하게 지켜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게 굳건한 벽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젊었던 나는 공허한 마음으로 나의 구멍 뚫린 벽들을 보며 울고 있었고, 그 벽을 고쳐 세울 기력을 내지 못한 채 중년의 남자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벽을 구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오히려 누군가의 벽이 되어 주고 싶었다. 무너진 성벽을 쌓아 올리고 튼튼해지면 뿔뿔이 흩어져 슬픔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돌아와 나를 붙잡고 우는 사람을 달래주는 통곡의 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탄식하는 예레미야의 얼굴, 동공이 풀린 눈동자가 무언가 꿈꾸는 듯하다.


램브란트의 그림 속 예레미야는 눈을 뜨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단지 비탄에 빠진 침묵을 넘어, 그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무얼 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천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세워지는 예루살렘의 성벽이었을까? 예레미야의 침묵은 맥 빠진 침묵이 아니라 천년 뒤의 환영(幻影)과 만나고 있는 예언가가의 꿈이다. 램브란트의 그림에는 침묵을 넘어 천 년 뒤를 바라보는 예언가의 얼굴이 서려있다.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 예레미야의 애가 마지막 부분


언젠가 나도 예루살렘에 가보고 싶다. 암스테르담에 가서 램브란트의 '탄식하는 예례미야를 보고 싶다.

이전 07화 램브란트의 '무녀 안나'에서 바흐(Bach)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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