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음악에서 가끔 신성함을 느낀다.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 샤펠 성당에서 바흐의 칸타타를 들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벅찬 환희와 감동에 사로잡힌 경배만이 구현되어 있었다. 단순한 선율은 쌓이고 쌓이더니 급기야 자기를 버리고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며 울려 퍼졌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흘러내리는 빛들이 성당을 에워싸고 있었다. 높은 천장 가득히 메워진 공명(共鳴)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의 찬양처럼 느껴졌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요한복음 1장 9절
꿈꾸는 자는 외롭다. 그는 몽상 속에서 지금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미래와 만나고 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분명한 현실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기꺼이 외로움을 수용한다. 지금은 사실이 아니지만 언젠가 사실로 다가올 미래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꿈은 마치 신탁과 같다.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고 자신에게만 들려온 목소리는 사람을 강하게 한다. 반드시 이루어질 거란 확신에 근거하기 때문에 납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탁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외롭다. 예수도 그랬을 것이다.
숫파니 파다에는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농사를 왜 짓지 않냐고 힐난하는 바라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바라문 촌에 머물고 계실 때이다. 마침 농사철이라 마을 사람들이 쟁기에 멍에를 묶고 있었고, 바라문 이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바라문이 음식을 받기 위해 서있는 부처님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나서 먹습니다. 사문이여. 그대도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십시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나서 드십시오.”
- 숫파니파다 중(中)
그 바라문은 자신이 나누어 주고 있는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부처님에게 노동하지 않는 것을 꾸짖는다. 그는 부처를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부처님께 귀의하여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 군자를 정의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 아닌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군자는 외로움을 숙명처럼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는 예언자처럼 미래를 보고, 뜻을 구현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 내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일도 어렵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가 섬처럼 갇혀서 타인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보고 살아간다. 중생이란 진실을 직면할 용기도 알아볼 안목도 갖추지 못한 존재일 뿐이다.
공자는 말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근심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그 구절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고독을 이기며 행여 자신의 부족함으로 성현(聖賢)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했던 사람들의 태도가 무겁게 에 와닿았다. 누군가를 알아보는 안목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게 내가 청년시절에 가졌던 일종의 화두였다.
이제 말씀하신 대로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누가복음 2장 29절
예수님이 살았던 시절,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 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었다. 어느 날 그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아기를 안고 온 마리아와 요셉을 상봉한다. 시므온은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 아이가 자신이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란 것을 알았다. 그날 성전에 있던 84세의 노파 안나도 ‘그리스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일까?
램브란트는 시므온과 안나가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온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아기 예수를 비추고 있다. 아기 예수의 머리 뒤에는 창문으로 들온 빛과 다른 어떤 빛이 머물고 있다. 시므온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 아이가 그리스도란 것을 근엄한 표정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서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있는 여인, 그녀가 바로 안나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안나는 결혼 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매일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경건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84세가 되어 성전에 온 예수를 만나는 축북을 받았다. 그야말로 일생의 기다림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환호하고 있다. 그녀의 기쁨의 환호성은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와락 덮칠 만큼 역동적이다. 하나를 위해 달려온 인생의 소명이 완성되는 경외 로운 현장을 목도하는 것처럼 뭉클하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황지우의 시처럼 무언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 행복했던 설레는 꿈의 시간이 자신을 얼마나 달아오르게 했는지를 , 고동치는 열망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기다리는 사람은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린다. 그들의 기다림에는 실패가 없다. 살아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망부석이 되고, 동백꽃이 되어. 참나무 위에 묶어둔 노란 손수건이 되어 우리의 삶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수를 만난 안나의 모습에는 고기잡이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소식 끊긴 아내, 생사를 모르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한숨을 다 녹여줄 ‘거룩한 만남’의 순간이 그려져 있다.
램브란트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성경을 읽고 있는 안나를 그렸다고 한다. 주름진 노파는 성경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에서 빛이 들어와 그녀가 읽고 있는 성경을 비추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녀가 문자로 된 성경이 아니라 그녀는 신성함을 만지고 느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문자 너머에 쓰여 있는, 빛의 모습으로 자신과 함께 하는 성령과 함께 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열어 무언가를 나직하게 읊조리고 있다. 그건 아마도 자신과 함께하는 신성에게 바치는 노래이거나 기도였을 것이다.
그녀가 성전에 묵묵히 무언가를 기다리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노파이거나 거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그녀의 사명을 그녀는 빛과 함께, 말씀과 함께 경건하게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가파르게 달려왔을 그녀의 삶은 아마 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루하루를 채웠던 신성한 행복이 부럽기만 하다. 부귀하고 영예로워 보이는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던 아기 예수를 그녀가 한눈에 알아본 것은 ‘그녀와 함께 했던 신성함’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 길고 경이로웠던 기다림은 그녀의 눈을 띄워 ‘아기 예수’를 알아보는 안목으로 열렸을 것이다. 신성함은 마음의 어둠을 걷어 간다. 나를 밝혀 주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안나처럼 알아볼 수 있을까? 나의 어둠을 몰아내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램브란트가 그린 ‘안나’ 그림을 보고 있자면, 파리의 샤펠 성당이 떠오른다. 오색영롱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내려 비추이던 그 장엄한 빛의 눈부심이 느껴진다. 그 사이로 흐르던 바흐의 음악을 '안나'도 듣고 있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게도 어렴풋히 어떤 존재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날 내가 들었던 바흐의 칸타타는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었다.
(Jesu, Joy of Man's Desiring / BWV 147)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 BWV 147 중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여' [KBS 클래식 FM 여름음악학교] - YouTube
Jesus bleibet meine Freude, 예수님은 나의 기쁨의 원천이시며
Meines Herzens Trost und Saft, 내마음의 본질이며 희망이십니다.
Jesus wehret allem Leide, 예수님은 모든 근심에서 (나를) 보호하시며
Er ist meines Lebens Kraft, 내 생명에는 힘의 근원이 되시며
Meiner Augen Lust und Sonne, 내 눈에는 태양이며 기쁨이 되시고
Meiner Seele Schatz und Wonne; 나의 영혼에는 기쁨이며 보물입니다
Darum laß ich Jesum nicht 그래서 나는 내 마음과 눈에서
Aus dem Herzen und Gesicht. 예수님을 멀리 하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