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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문 Oct 29. 2022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보고 울다.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 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다,
자신의 보리수 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 김승희, ‘보리수 나무 아래로’ 중에서

별을 보고 밤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다. 40도가 넘는 한낮의 열기를 피해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별은 희망이었다. 혜초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서 타클라마칸을 건너 천축국으로 갔다. 무작정 길을 떠나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역마살을 숙명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집 뒤 매화나무 가지에 피어난 꽃송이는 세계를 만나 좌절하고 돌아온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봄의 축복이다. 


All road read to Rome 모든 길은 결국 로마로 통한다.


나는 그 말에서 얼마나 위안을 얻었는지 모른다. 어디로 이어질 모르는 길을 걷다 보면 끝에서 로마에 도달하리란 믿음이 내 인생의 수십 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 여행의 끝에서 부처님처럼 보리수나무 아래 틀어 앉아 ‘깨달음’에 도달할 거란 바람은 나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거기가 내가 꿈꾸는 로마였다.


파리의 자끄 앙드레 뮤지엄


파리의 자크 앙드레 뮤지엄에서 나는 울었다. 17세기 램브란트가 23살에 그렸던 작은 화폭에는 어떤 사내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내의 머리 뒤편에는 밝은 빛이 흘러나와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 사내는 바로 부활한 예수이다. 


예수가 죽은 지 3일 뒤, 예수의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여행 중에 그들은 낯선 남자를 만나 엠마오까지 동행했다. 날이 저물자 그들은 낯선 남자와 한 숙소에서 묵기를 제안했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가 빵을 나누어 주는 순간 그들은 하루 종일 함께 걸었던 낯선 남자가 바로 그들의 스승 ‘예수’ 임을 알아차렸다. 


Rembrandt, The Supper at Emmaus,1629, Musée Jacquemart-André  37.4 cm * 42.3 cm. oil on panel


그림 속 예수는 무표정하다. 그의 뒤에서 피어오르는 불빛은 곧 전신을 휘감을 것이고 사라져 버릴 것임을 암시한다. 한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 속의 어두운 화면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일행 중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의 발아래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다. 아마 그는 스승 앞에서 까닭 모를 경건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 것은 예수의 발아래 절하는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20년 전 어느 겨울밤으로 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엠마오의 저녁식사 부분 확대, 예수의 발아래 무릎 꿇은 제자가 있다.



아직도 봉선사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귓가에는 헛된 울림만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어둠이 휘장처럼 감싸고 있었기에 눈을 떠봐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또렷해지는 의식. 부르르 떨려오는 외로움. 숨이 막혔다. 도망가고 싶었다. 옥죄이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다. 주섬주섬 이부자리 걷어 부치고, 숨죽이며 까치발로 창호지 문 열었을 때, 어두운 마루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스승의 경건한 모습을 보았다. 


70세의 월운 노스님께선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정면을 뚫어지게 보고 계셨는데,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숭고했다. 나도 모르게 스승께 절을 올리고 바닥에 함께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한 20여분이 흐른 뒤였던 듯하다. 


“ 싱거운 녀석 같으니라고” 


노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셨고 나만 홀로 남았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추함을 덮어주려는 듯, 잡소리까지 다 먹어 버린 채 평등심으로 나리던 그 순백의 향연이 아름다웠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2, 262 ×206㎝, 에르미타주 미술관


램브란트는 ‘엠마오의 저녁식사’에서 묘사한 무릎 꿇고 경배하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탕자의 귀환’이란 작품을 그렸다. 탕자의 귀환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장면으로 기나긴 방황 끝에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떤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실수와 방황을 참회하고, 아버지는 넓은 가슴으로 그를 받아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는 회복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기쁨의 순간을 축복해주고 있다. 어제의 일은 더 이상 현재가 아니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피가로의 결혼 4막의 용서를 비는 장면을 두고, ‘신이 모차르트를 내세워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무릎을 꿇은 백작을 용서하는 관용의 목소리가 천상의 음악처럼 울려 퍼진다. 모차르트는 참회로 비롯되어 화해에 도달하는 기쁨을 합창으로 절묘하게 그려내었다. 엠마오의 저녁식사에서는 모차르트의 합창으로 구현한 ‘따듯한 포옹’이 침묵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질책도 위로도 없다. 그저 말없이 안아 주는 스승의 넓은 품이 합창으로 울려 퍼진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Amadeus 1984 HDDVD 720P x264 DTS miki - YouTube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피가로의 결혼 4막에 나오는 용서를 비는 장면을 두고, ‘신이 모차르트를 내세워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무릎 꿇은 백작을 용서하는 관용의 목소리가 천상의 음악처럼 울려 퍼진다. 모차르트는 참회로 비롯되어 화해에 도달하는 기쁨을 합창으로 절묘하게 그려내었다. 


엠마오의 저녁식사에서는, 탕자의 귀환에서는 모차르트가 합창으로 구현한 ‘따듯한 포옹’이 침묵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질책도 위로도 없다. 그저 말없이 안아 주는 스승의 넓은 품이 합창으로 울려 퍼진다.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노스님을 모시고 방 닦고 빨래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봉선사의 겨울밤 내가 느꼈던 숭고함의 정체를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건 묵묵히 기다려 주는 스승의 모습이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곁에서 모시지 못하는 월운스님 생각이 날 때면, 피가로의 결혼의 합창곡 ‘Contessa Perdon’(저를 용서하소서)를 듣는다. 


거기가 나의 로마다.


Le nozze di Figaro: 'Contessa perdono' ('Countess, forgive me') – Glyndebourne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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