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의 '막달라 마리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솔로몬의 전도서 중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처럼 강렬한 것이 어디 있으랴.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는 허락된 영역 안을 들어다 보려는 사람들의 숨 막히는 호기심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632년 1월 16일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그날 처형된 범죄자의 시신을 해부하고 있는 모습을 7명의 의사가 지켜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17세기는 과학의 시대였다. 인류는 학문의 이름으로 논리와 실증을 통해 신의 영역을 가늠해 보고자 했다. 도서관에 파묻혀 만권의 책을 읽고, 인체의 신비를 알고자 배를 갈라 보았지만 진정으로 인간이 얻고자 했던 구원은 없었다. 회색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해골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우리가 결국은 잃어버리게 될 아름다움, 소중함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듯하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산다. 우리고 살고 있는 현재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 끝에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를 바니타스(Vanitas)라고 부르는데, 솔로몬이 지은 성경의 전도서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바니타스의 상징에는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는 두개골, 썩은 과일, 거품, 양초 같은 것들이 형상화되어 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한번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백골관을 수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가난해서 장작을 구할 수 없는 천민들은 시체를 그냥 숲 속에 버리곤 하였다. 사람이 죽은 뒤 육신이 사그라져 백골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육신의 허망함을 요달케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머리를 깎았을 무렵 들었던 우바리 존자의 게송을 기억한다..
신심(信心)으로써 욕락(欲樂)을 버리고, 일찍 발심(發心)한 젊은 출가자들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만을 고고하게 걸어서 가라
영원한 것이란 진리의 길일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세속의 길일 것이다. 괜스레 그 게송을 외울 때면 마음이 경건해 지곤 했다. 뒷날 누군가 산스크리트어 원본을 확인해 보니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번역되는 게 정확하다고 말해 주었다. 불교의 핵심 교리인 ‘제행무상(諸行無常:영원한 것은 없다)’의 원리와 번역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번역이 어쨌든,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참회와 별개로 나는 그 게송이 좋았다. 20대의 쓸쓸한 나는 파랗게 깎은 머리로 빗자루 질 하며 '영원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카라바조의 그림 “히에로니무스”는 욕락을 버리고 영원을 향해 날아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표상이다. 기독교 신학의 교부이기도 하는 히메로 무스의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백골관 수행자’이다. 그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는 삶으로 전환시키려는 성자의 모습이다. 진지한 얼굴로 그는 삶의 유한함과 세속적 가치를 넘어 전환하고자 무언가를 써내려 가고 있다.
로마의 개선장군이 승리의 퍼레이드에서 환호를 받을 때, 노예가 장군의 뒷좌석에서 득의양양한 장군을 향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속삭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로운 시절은 떠나갈 것이고 당신도 이제 죽음에 도달할 것임을 잊지 말게 하는 취지였을 것이다. 네덜란드 바니타스화에 등장하는 해골은 그 노예가 속삭이던 '메멘토 모리'의 구체적 형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생명의 나무다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괴테가 평생에 걸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는 바니타스(Vanitas) 다음의 문제에 봉착한 인간의 이야기다. 파우스트 박사는 지식의 끝에서 탄식한다.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열심히 노력해서 연구를 끝마쳤지만, 우리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 내 가슴속에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한다. 하나는 불타는 애욕을 갖고 매달리는 관능으로 현세에 달라붙어 있다. 다른 하나는 억지로 이 속세를 벗어나 숭고한 영들의 세계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인식할수록 삶은 공허해진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진리를 구해 달려온 파우스트에게 밀려오는 공허감은 배움의 깊이만큼 컷을 듯하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 무력하기만 한 지식인의 탄식을 고백한다.
“나는 놀고먹기에는 너무 늙었고,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기에는 아직 너무도 젊다. 세상이 대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파우스트는 바니타스(Vanitas)의 결론으로 관능을 선택하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에는 모든 학문의 부질없음에 절망한 파우스트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이 찾아온다. 파우스트는 그에게 청춘을 달라고 말한다. 그는 ‘불타는 애욕을 갖고 매달리는 관능으로 현세에 달라붙어’ 있고자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한다.
카르페디엠 , 살아 있는 현재를 즐겨라.
그 또한 한 편의 삶일 것이다. 성 히에로니무스처럼 죽음을 인지했기 때문에 더욱 종교와 학문에 열중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파우스트처럼 관능과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은 듯하다.
20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본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한 손에 해골을 쥐고 거울 속의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촛불은 유한한 생명을 상징할 것이고, 손에 쥐고 있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할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묵상을 통해 바니타스(Vanitas)를 극복하고자 하는 듯이 보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를 사랑한 여인이다. 그녀는 값비싼 향유를 사서 예수에게 바쳤으며, 십자가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부활한 예수와 만났던 인물이었다. 해골이 죽음을 상징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묵상은 ‘죽음을 이겨낸 삶'에 대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불룩한 배였다. 화가는 막달라 마리아가 흡사 임신한 것처럼 묘사해 놓고 있었다. 순간 영화 다빈치 코드가 떠올랐다. 다빈치 코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에서 시작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고, 예수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 혈통이 프랑스 메로빙거 왕가의 혈통이었다는 것,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 쓰였던 성배가 곧 그녀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간 영화였다.
임신한 막달라 마리아는 무엇을 묵상하고 있는 것일까? 막달라 마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표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예수의 후손이 메로빙거 왕조를 만들었다는 전설을 인용한다면, 그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살아갈 다음 세대를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흡사 낙원에서 쫓겨난 뒤, 낯설고 막막한 땅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이브의 얼굴' 같은 것을 느낀다. 이브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생명"의 뜻이라고 한다. 임신한 여인의 묵상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거룩한 것 같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림 속서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들었던 사랑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 YouTube
파우스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막을 내린다.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 네게 주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라고 말했다.
결국 허망하고 권태로운 삶을 구원하는 힘은 ‘사랑’뿐인 것인가? 잡힐 듯 말 듯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