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사랑에 빠진 다윗과 밧세바를 그리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교황청은 그레고리 알레그리(Gregorio Allegri;1582-1652)에 의해서 1629년 작곡된 합창곡을 오로지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연주하게 했다. 아름다움이 주는 ‘홀림’에 넋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걱정되었고, 어쩌면 너무나 아름다워서 신을 잊게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악보 유출을 막기 위해 성가대원에게 해당 부분만의 악보만을 나누어 주었고, 연주가 끝나면 바로 걷었다고 한다. 교황청의 철저한 보안을 해킹해 버린 사람은 모차르트였다. 14살의 모차르트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이 곡을 들은 뒤, 그대로 외워 악보를 그려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감탄한 교황청은 모차르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훈장을 수여해서 격려했다고 한다. 이 위대한 금지곡의 이름은 ‘미제레레-Miserere’, 다윗이 지은 시에 선율을 붙인 합창곡이다.
MISERERE MEI, DEUS - Mozart - YouTube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 시편 51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동침한 뒤, 써 내려간 일종의 참회문이다. 어느 날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밧세바는 다윗의 충직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였다. 다윗은 우리야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여 결혼한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을 힐난한다. 그는 다윗에게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란 신탁을 전한다.
나단의 꾸짖음을 받은 다윗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기도한다. 그때 죄를 뉘우치며 다윗이 지은 기도문이 바로 시편 51편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지은 시라고 쓰여 있다.
나는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중학교를 다녔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는 학교였고, 아침마다 수업 전에 방송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있었다. 아침예배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바이블을 읽어 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시편’을 자주 읽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시편만큼은 저절로 관심이 기울어지곤 했다. 그런데 시편을 읽다 보니 시편 150편 중 반이상이 다윗이 지은 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시가 골고루 수록되지 못하고 어째서 다윗의 시만이 그토록 대거 수록된 것일까?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대뜸 성경 수업시간 중 손을 들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 선생님,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왜 그렇게 많이 실린 거예요?”
“ 음 그건 아마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찬양을 가장 사랑하셨기 때문이란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부도덕한 왕이었다. 그는 부하를 전장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고 부하의 아내를 취했으며, 그로 인한 벌로 밧세바로부터 얻은 첫아들을 잃었으며, 아들들끼리 일으킨 골육상쟁을 겪었던 사람이었다. 다윗은 신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처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봐야 옳은 것 아니었을까?
△ 좌측 상단에서 밧세바를 바라보는 다윗의 모습이 보인다. 제롬의 또 다른 그림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에 나오는 아름다운 조각 갈라테이아의 뒷모습과 바세바의 뒷모습이 겹친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아름다움을 지닌 밧세바에게 경도되는 다윗의 심경을 잡아낸 걸작이다. 예루살렘의 은은한 저녁노을과 파란 하늘이 대비되어 인상적이다. 그림의 시선이 밧세바에게 모아지고 있다.
밧세바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권력자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여인을 취하는 행위이다. 이른바 위계에 의한 간음이다. 루브르에서 램브란트의 그림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았을 때, 어릴 때 성경 선생님에게 던졌던 질문과 ‘밧세바 신드롬’이 생각났다. 그림 속의 여인은 슬프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편지는 다윗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하다. 권력을 이용하여 여인을 취한 자를 신은 왜 사랑했던 것일까? 밧세바는 다윗의 요청을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더욱 의문스러운 것은 램브란트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큰 과오를 종교화로 그렸다는 점이다. 램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다윗을 꾸짖고 싶었던 것일까? 무언가 램브란트의 그림이 종교화가 되려면 단순히 권력 앞에 고민하는 어지러운 정을 넘어선 숭고미가 구현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램브란트의 그림 앞에서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다.
다윗은 원대한 꿈이 있었다. 다윗은 언약의 궤를 찾아서 자신의 성으로 모셔온 일이 있었다. 그때 다윗은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날 밤 나단은 다윗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신으로부터 계시받는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사무엘 하 7장
다윗은 성전을 건립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현하고자 한다. 그 원대한 꿈은 다윗의 시대를 너머 그 아들까지 가서야 이루어졌다. 예언을 성취한 그 아들은 밧세바로부터 낳은 아들 중의 하나였다. 밧세바로부터 얻었던 첫 번째 아들은 나단의 예언대로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병에 걸리자 7일이나 금식기도를 행하며 살아나기를 기도했으나 소용없었다. 아이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하며, 다시 동침하여 또다시 아들을 얻는다. 그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불렸던 솔로몬이었다.
다윗은 젊은 시절 기반을 닦으며 고생했다. 다윗은 여러 여자와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여인들은 다윗을 사랑했지만, 다윗이 그 여인들을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른바 정략결혼이었던 듯하다. 다윗은 사울 왕의 딸 미갈을 첫 번째 아내로 맞았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고 사울로부터 목숨을 지켜주었지만, 다윗은 그녀를 그다지 사랑했던 것 같지 않다. 다윗이 언약 의궤를 모셔왔던 그날, 미갈은 춤추며 기뻐하는 다윗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춤추는 다윗을 비천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다윗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었다.
다윗은 여러 아들들이 있었지만 골육상쟁으로 2명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된다. 첫째 아들 암논은 셋째 압살롬이란 아들에 의해 살해 외었고, 셋째 압살론은 다윗에게 모반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윗의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둘째 길르압은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의 아들인데 바이블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아마도 어려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아들은 아도니아였다. 그는 암논과 압살롬이 죽었으므로 가장 연장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후계자로 내세우지 않았다. 다윗이 늙어 기동조차 어렵게 되자 아버지를 제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할 때, 밧세바는 다시 한번 성경에 등장한다. 밧세바는 침상에 누워있는 늙은 다윗을 찾아가 놀라운 이야기를 말한다.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르켜 여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애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거늘 이제 아도니아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열왕기 상 제 1장
△ 밧세바는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윗을 찾아간다. 그림 속 다윗의 얼굴이 평온하다.
그랬던 것이다. 다윗은 이미 오래전부터 밧세바에게 낳은 아들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을 통해 자신의 꿈 이스라엘의 영광을 증거 할 성전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밧세바도 오래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날이 찾아왔음을 다윗에게 통지한다. 어쩌면 그녀는 다윗의 부름을 받는 그날에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성령이 찾아와 네가 ‘하느님의 성전’을 지을 아들을 낳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이 성전을 짓게 될 왕을 낳게 되는 운명의 여인이었음을.
다윗의 편지를 받은 밧세바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램브란트의 그림 속 여인은 몸을 정결히 하고 자신을 부르는 운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녀의 슬픔은 인간적인 것과 운명적인 것과의 갈등이다. 신탁을 수행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사명에 순응하고자 하는 포기의 모습, 그녀의 슬픈 표정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시편 51편의 마지막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우리는 인간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그래서 우리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다윗의 부도덕함을 비난하게 된다. 밧세바의 나약함에 연민하면서도 권력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음을 수치스럽게 바라본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판단을 넘어선 이야기로 기도를 마친다. 그의 참회문은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운명과 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윗 역시 시편 51편을 쓰던 그날, 밧세바의 아들이 예루살렘 성을 쌓고, 성전을 짓게 되리란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운명은 언제나 한 사람의 인생을 감당하기 어렵게 누른다. 피할 수 없는 신탁을 받고 이루어 가야 하는 사람들의 묵묵한 아픔들이 동통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다윗과 밧세바의 과오로 낳은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솔로몬이었고, 그가 하느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성전을 짓는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을 받은 연인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이 왜 그들의 혈통에서 왕을 낳게 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현했고, 예수가 탄생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했던 것일까? 신은 왜 그런 축복을 그들에게 내렸던 것일까?
2018년 예술의 전당에서는 ‘샤갈 러브 앤 라이프 전’ 이 열렸다. 국립 이스라엘 미술관 소장 작들이 전시된다고 해서 한번 가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특별한 다윗의 모습을 보았다. 샤갈의 작품 속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아니라 웃고 춤추며 노래하는 듯한 다윗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품었던 다윗과 밧세바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주는 한 장의 그림을 만났다.
샤갈의 그림 속에서 다윗과 밧세바는 하나의 얼굴을 이루고 있다.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완전한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평화롭던 시기의 아담과 이브처럼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천사가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천사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 먼 훗날 자신의 혈통에게서 태어나게 될 예수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부터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치명적 사랑에 빠져 버렸던 것 같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샤갈에 와서야 비로소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그들은 굴레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위대한 영혼들이다. 샤갈의 그림을 보며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솔로몬을 낳을 만큼의 충분한 자격을 지는 사람이었음을 비로소 느낀다. 램브란트의 그림에 드러난 슬픈 바세바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날 다윗도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운명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익숙한 것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고린도 전서는 희망의 불을 밝혀준다. 고린도전서의 사랑이 신에게 바쳐진 사랑이요, 남녀의 어지러운 정이 아닌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중생의 업식에 있어서 신에게 바쳐지는 사랑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종족적 한계에 부딪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그 벅차고 위대한 사랑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을 뿐이다. 밧세바와의 사랑 때문에 참회하는 다윗은 그래서 꿈을 꿀 수 있었고,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야 나는 사랑의 비밀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모차르트가 세상에 누설해준 다윗의 노래 ‘미제레레’를 듣고 싶어 진다.
“주여, 저를 불쌍하게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