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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문 Oct 29. 2022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사랑 그 고독한 아름다움에 대해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 사랑 그 고독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프랑소아즈 사강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표지. 마침표 3개가 인상적이다.

 

스무살이었다. 촌놈티를 벗어버리고 싶어서 들었던 ‘서양 음악사’ 수업에서 브람스 심포니 1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브람스가 악상을 떠올린 것은 22세(1854)였다고 했다. 그러나 교향곡 1번이 완성된 것은 1876년 44세의 일이라고 했다. 무려 23년이나 걸린 셈이었다. 교수는 브람스 심포니중 4악장을 들려주었다. 자기는 브람스 심포니 4악장을 들을때면 바다에서 고래가 뛰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눈을 감고 브람스를 들으며 나는 세월의 힘으로 깎아진 음악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 나이보다 많은 세월이 걸린 장인의 손길에 존경심같은 것을 느꼈다.


 브람스란 사람이 궁금해진 나는 학교도서관에서 프랑소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시나요’ 란 소설책을 빌렸다. 생각과는 다르게 브람스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39세의 폴이란 여자의 연애 이야기였는데, 그녀보다 14세 어린 25세의 시몽이란 젊은 남자의 음악회 초대 편지에서 고작 한번 브람스가 언급 될 뿐이었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Salle Pleyel)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프랑소와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시나요?’에서

 소설은 지루했다. 프랑스 여인의 복잡한 심리묘사와 남자관계가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브람스를 좀 알아보려고 집어든 소설이었기에 아마 중간쯤에서 책읽기를 중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랑을 잘 알지 못했던 스무살의 어느 봄날이었다.


Jean-Leon Gerome, Pygmalion et Galatee, 1890,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09년 1월. 흰눈이 센트럴파크에 흩날리던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피그말리온을 보았다. 멀리서 큐피트가 화살을 쏘고 있었고, 조각상은 아직 다리부분은 인간이 되지 못한채, 자신에게 몰입한 조각가와 급하게 키스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다리가 풀릴 만큼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피와 살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과 허리를 부여잡고 희열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작가는 두 남녀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환하게 미소짓는 여인의 얼굴과 눈알에서 수정처럼 떨어지는 남자의 눈물이 선명하게 들여다 보였다.


울고 있는 남자는 피그말리온이란 사람이다. 그는 현실의 여성을 불신한 나머지 이상적인 여성을 스스로 상아에 조각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자고, 먹고, 입맞춤하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피와 살이 뛰놀지 못하는 사랑하는 그녀의 현실에 무척이나 괴로워했으리라. 이를 가엾게 생각한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감격에 잠겨 그녀를 안고 울었으리라.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결혼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칭찬과 노력, 열심히 무언가를 구하면 드디어 현실에서 구현될꺼라고. 그러나 그것은 신화속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가다 보면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에게 될뿐이다.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에는 아마도 한 구절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굳이 빠진 구절을 전 넣으라면 아마도 ‘상상속에서’일 것이다. 


우리가 발디디고 살아가는 세상에는 마법이 없다. 차디찬 상아조각이 인간의 육체로 환원되어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은 언제까지나 조각을 사랑하는 남자일뿐이다. 간혹 아프로디테의 마법으로 혼자만의 환상속에서 그녀의 현현과 만날 뿐이다. 꿈을 쫓느라 현실을 외면한 슬픈 남자요, 고독하고 쓸쓸한 홀아비일 뿐이다. 그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 갈라테이아는 ‘거품의 요정’이란 뜻이라고 한다. 세속의 아름다움이란 순간에만 존재하고 지속되지 않는다.


일체의 세상일은 꿈같고 허깨비같고 거품같고 그림자 같다(금강경)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함께 하고자 하나 함께할 수 없는 아련함.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하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


피그말리온을 보고 돌아오는길에 브람스를 헤아려보았다. 브람스는 슈만 사후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보살폈다. 브람스가 슈만을 처음만난 해는 1853년 9월 이었다. 브람스는 21세, 슈만은 43세였다. 그리고 슈만의 부인 클라라는 34세였다. 브람스는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버린 듯 하다. 1854년 슈만은 정신착란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그때부터 브람스는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교향곡 1번을 착상했다는 1854년은 슈만이 슈만이 자살미수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해였다. 클라라는 슈만 사후 브람스와 열정적인 사랑을 이어가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들은 왜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클라라는 슈만 부인으로 끝까지 남으려고 했던 듯 하다. 그녀는 브람스가 보내는 구애를 끝내 받아 주지 않았다. 14살 연하의 브람스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슈만 사후 그녀는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생애를 보냈다는 대목에 이르면 뭔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그녀의 한숨이 보이는 듯하다. 


브람스는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기록에 의하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던 듯하지만 끝내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살았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자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 자신도 세상을 떠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의 언어는 무겁다. 음악에서도 낙엽 다 떨어진 가을날의 갈홍색 숲속처럼 쓸쓸함이 묻어난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거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위험한 것 같다. 사랑은 종종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놀랍게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고통에 빠질지라도 사랑안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자아도취적인 기적이다.


 섶을 지고 사랑의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그를 드토록 이글거리게 만들었을까? 둘사이에 존재하는 금기의 벽을 넘어 몸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써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저주를 그들은 어떻게 참아낸 것일까?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 생각이 미친다. 시몽이란 25세의 청년과 폴이란 39세의 여자의 지루했던 이야기는 어떻게 명작의 반열이 이르렀던 것일까? 시몽과 폴은 14세 차이였다. 폴은 생각한다. “그가 39세가 되었을 때, 나는 53세 일 거야. 그때가 되면 그는 나에 대한 흥미를 잃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떠나게 되겠지” 그래서 그녀는 시몽의 곁에 머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14살 차이. 브람스와 클라라도 14세 차이였다. 클라라는 폴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브람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브람스’를 연주하면서 사는 삶을 선택했던 것일까? 


시몽이 적어 보낸 음악회 초청장을 떠올린다. 그는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40이 넘어서야 그 편지와 그 소설의 제목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14살의 나이차이가 주는 장벽을 넘어서, 그녀 옆에 머물고 싶었던 젊은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눈앞에 현현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영원함을 믿고 거기에 몸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불행은 없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연인과 이미 교감하고 있으며, 그들을 멀리 떨어져서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브람스 심포니 1번 4악장을 들으면, ‘고래가 뛰노는 것 같다’는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브람스 심포니 4악장에는 사랑에 빠진 청년의 심장 소리가 숨겨져 있다. 거기에는 20년에 걸쳐 익어간 사랑의 설레임이 펄떡 대며 노래 부른다. 브람스는, 시몽은 그리고 피그말리온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의 눈에 비추어진 것처럼 고독하거나 슬프지 않다. 제롬의 피그말리온 그림속에는 완전한 순간이 녹아 있다. 휘청 다리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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