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식으로 이야기해 보는 2024 추석_②

2편

by 하나경

아빠의 무의식이 3단계로 접어들었다. 아직 저녁 10시도 안된 시각이다. TV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다음 주 내내 30도가 넘는 폭염일 예정이니 성묘 갈 때 조심하라는 말을 웃는 낯으로 하고 있다. 아빠는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상태에서 말을 한다. 주제는 '의도치 않게 손이 귀해져 버린 우리 집안에 대한,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아빠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푸념'이다. 나는 사촌 수가 적은 것에 대해 평생을 통틀어 아무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것은 우리 집안 문제도 아니고 순수하게 당신만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고민일 것이다. 아빠는 사촌들이 많아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이다. 참으로 우애가 흘러넘치는 31대손이다.

“지금 너 친가 쪽 사촌이 몇 명이냐. 고작 두 명이지. 아빠 사촌은 몇 명 있을 것 같냐. 총 17명이야. 어릴 때 그 많은 형제들이랑 시골에서 뛰어다니면서 놀고 그랬다.”

"네가 그래도 이 집안의 대장 아니냐. 동생한테도. 사촌들한테도 조금씩 더 챙겨주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줘.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도 좀 자주 하고."

당신들의 사정이 있듯이 나도 나만의 사정이 있다. 부모님을 어지간히도 닦달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여전하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친가 쪽 사촌들과는 일말의 유대감도 없으며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가 너무 편협하고 고집스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습관적이고 강박적인 자기검열을 잠깐 해보았으나 그럼에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외동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물었을 때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모한테 집중된 사랑과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상하게 다음날 와타나베의 대사를 읽는데 아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놈의 장녀, 기둥 얘기는 어릴 적부터 삼촌들한테까지 듣고 자란 얘기라 들을때마다 거부감이 들었는데 그날은 담담했다.

“아빠한테 뭐 또 하고 싶은 말 없냐.”

나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없어요. 옛날에는 많았는데 생각도 안 나요.”

아빠는 설풋 웃더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것이 많이 없듯이 나도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다. 아빠 덕분에 클래식을 듣게 되었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클래식은 모른다. 아빠 덕분에 플룻을 배웠지만 그가 연주회 때 연주했던 곡이 뭔지는 모른다. 크면 클수록 내가 싫어한 사람의 성격이 나에게서 보일때가 많다. 불편하면 입을 닫아버리는 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욱하는 성격도. 그리고 이 성격은 할아버지에게서 왔다. 삼촌들까지 가지고 있는 그 꼬장꼬장하고 더러운 성격.

오늘은 토요일이고 사흘 뒤면 추석 당일이다. 그날은 처음으로 수곡리 묘소를 방문해 보기로 아빠와 약속했다. ‘당신 형제들끼리의 유대감일 뿐이고 좋으면 당신들끼리나 하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감대 하나 없는 사촌들이랑 무리해서 친해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 사람들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된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빠와 술을 마신 다음날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직후부터 뭐에 홀린 듯 휴대폰 메모장에다 생각나는 대로 지금의 글을 쓰고 있다.

괜찮은 소설책을 읽어서인지 주름이 선명해진 아빠의 술 취한 푸념을 들었기 때문인지 얼마전에 받았던 심리상담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눈곱만큼 생겼기 때문인지.

소설에서 레이코가 와타나베와 헤어지기 전에 말한다. 꼭 행복해야 한다고. 너에게 할 충고는 모두 다 했으니 나는 떠난다고. 아픔을 잊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노력하는 와타나베는 답을 찾았을까. 한 달 전 상담했던 선생님이 그랬다. 어릴 적 제대로 된 사춘기를 보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지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에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소설 속 인물 나오코는 그런 답을 계속해서 찾아내다가 자살했다.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과거에는 그런 답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고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지금은 불안함에도 안심한다. 가족묘 앞에 대표로 묵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아빠의 말에 안심했던 나처럼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원인을 나중에라도 알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렇게 오랜만의 가족 술자리는 마무리 되어갔다. 나는 추석이 되기 전까지 거실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상실의 시대를 읽고 과일을 까먹었으며 넷플릭스에 있는 추천 영화들을 차례로 섭렵했다.

화요일 추석 당일이 되었다. 오전 일찍 할아버지 댁에 당도해서 삼촌 가족들과 점심을 먹었다. 날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성묘를 하러 출발할 요량이었다.

할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지는 6년이 넘는다. 이직하기 전 무렵이었다. 지긋지긋한 회사를 관두고 아빠와 삼촌을 보기 위해 순천에 갔다. 순천만 정원도 구경하고 구수한 전라도 병어회와 잎새주를 먹으며 즐겁고 들뜬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순천까지 내려온 김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다음 날 오전 아빠의 차를 타고 할아버지 아파트로 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살짝 열린 아파트 현관문 사이로 할아버지의 흥분한 목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온 것을 삼촌에게 전화로 들은 건지 할머니에게 화내면서 이야기하고 있던 거였다. 그때까지 나에 대한 일로 흥분하신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당신은 현관문에 서있는 나를 보자마자 독설을 시작했다. 내가 자기 허락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순천까지 가서 싸돌아다닌 게 많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길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이후 할아버지에게 어떠한 말도 해본 적 없다. 명절 때마다 당신 집을 가도 방 문턱에 서서 고개만 대충 까딱이고 나오기 일쑤였다. 할아버지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지낼 줄 알았건만 이번 추석은 조금 다르다. 큰손녀가 처음으로 성묘 간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안으로 친히 들어오라는 얘길 한다. 전날 삼촌이 미리 언질을 한 모양이다. 6년 만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현관에 발을 딛기도 전에 나에게 독설을 퍼붓던 과거의 모습이 겹쳐진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당신의 하얀 머리카락만 보면서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가 거의 엎드리다시피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입술과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대화는 뻔하고 진부한 내용이다. 네가 장남이면 밑에 애들 잘 이끌고 집안도 잘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장녀라서.. 따위의 신파 같은 말이었다. 부잣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도 아니고 요즘같은 세상에 장남이 웬말인가. 뒤에 뭐라고 더 하신 것 같았는데 끝엔 거의 웅얼대다시피 말씀하셔서 듣기 싫은 마음에 얼렁뚱땅 대화를 마무리 짓고 방을 나왔다. 문턱을 넘은 직후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도 가벼운 증오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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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팅 된 창을 뚫을 기세로 따가운 태양빛이 그대로 목과 팔에 내리쬔다. 에어컨 바람으로도 식혀지지 않은 카시트의 눅진한 열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겁고 뜨거운 열을 머금은 차를 타고 굽이굽은 길을 따라 수곡리에 가고 있다. 하체가 답답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스티커가 떼어지듯이 시트에 붙어있던 살과 인조가족이 쩌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뜨거워서 괴로운 추석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쪽으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얼굴만 시원하다 못해 싸늘하다. 몸의 부위마다 첨예한 온도차를 이루는 상황에서 생각했다. 왜 성묘를 가고 싶다고 했을까. 나는 뭘 하고 싶은 건가.

나가사와가 이끄는 대로 신주쿠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녔던 와타나베처럼 추석 내내 나의 정신도 계속해서 무심한 바다를 표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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