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무슨 일을 해도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지만 이 불편한 감정이 무엇 때문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일종의 강박이 있는 사람이다.
계획한 일을 하지 않거나,
가시적인 성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항상 이런 불편함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내가 시간을 잘 운용하거나,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게으름을 피우면서 이런 불안정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이 되어간다.
나의 불안과 초조함의 근원은,
그림 그리기를 멈춘 데 있다.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면,
다시 집중하기까지는
여러 날, 여러 달이 걸린다.
어떤 이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듯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의 그림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다.
감정이 닿아야 그릴 수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멈추면
나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나는 미술대학을 나와 정규코스를 밟은 것도 아니고,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잇는 작가도 아니다.
나의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만 비롯된다.
어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림과 나의 밀당이 시작된다.
시작은 언제나 나의 주도로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림에게 힘없이 주도권을 내어준다.
그림이 시키는 대로,
선을 그리고 색을 채우고 형태를 바꾼다.
그림이 거부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그린다.
나에게 그림이란 일기를 쓰는 행위와 같다.
내 속에서 아우성치는 여러 감정들을 그림을 통해 토해내기도 하고 잠재우기도 한다.
그림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그림은 나의 치유인 동시에 성장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