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대로였다 변한 것 나였다
“최 선생, 작업을 하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버리지 말게, 그냥 한편에 놓아둬.
그러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보게 되면 달라 보이는 그림들이 있어.”
나의 멘토이시기도 한 원로작가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그때는 흘려들었다.
무작정 앞만 보고 갔던 시절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미련 없이 덮었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거지.’
한 작품을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밀어붙였다.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다 회복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가차 없이 지웠다.
한숨 멈추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적지 않은 그림들이 그렇게 사라져 갔다.
어느 날,
“어? 이걸 내가 언제 그렸지? 괜찮은데...”
망쳤다고 생각한 그림이, 작업실 한 구석에서 눈에 띄었다.
가끔은,
“아...... 그때 그 그림은 남겨 둘 걸.”
하는 것들도 있었다.
이후로, 나는 내 그림에 조금씩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림과 나 사이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것들이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그중 대부분은 결국 지워진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
"아니 내가 왜 이걸 망쳤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싸인까지 마친 그림이, 시간이 지난 후엔 너무나 엉성해 보일 때도 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걸까?
시간이 흐른 만큼 나의 안목이 깊어진 것일 수 있고,
그때 작품과 내 감정이 서로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 나도 변하고,
그림이란 게 그때의 감정에 따라 달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은 그대로인데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닌 것이다.
같은 책이라도
청년 시절과 나이 들어 다시 읽었을 때 감흥은 다르지 않던가.
그림이 변하는 것도,
책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변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세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이 변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이 맞을 수도,
그때는 맞고 지금이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에 절망할 필요도,
환호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