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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마루 Nov 03. 2021

작심사일만 하기, 3일 차

 나이를 먹으니까 좋다, 지혜가 생겨서 좋다


 '작심사일만 하기' 3일 차, 오늘은 어디로 가지? 나는 목적지를 찾아 카카오 맵을 켰다. 목적지를 정할 때 내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의 체력을 고려해서 왕복 40km를 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전혀 모르는 장소보다는 전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적이 있는, 추억이 깃든 곳이어야 한다. 지하철과 버스로 갔던 그곳을 이번에는 오롯이 내 두 다리의 힘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가보고 싶다. 도시락을 까먹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이때까지만 해도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사색하기 좋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거참 까다롭네. 그냥 대충 아무 데나 가"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나라는 사람은 '대충', '적당히'가 잘 안된다.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문제는 내가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슈퍼 영웅이 아니다. 나의 한계를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아서 내 안의 완벽주의와 불안을 다루는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첫째는 모든 일을 다 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 다 잘하려고 하다가 다 못하게 되는 수가 있다. 한 예로, '작심사일만 하기' 챌린지가 진행되는 동안 '챌린지 성공'을 위해 평소와 다르게 집안일은 대충 했다. 바닥은 테이프클리너와 두툼한 물티슈로, 저녁 식사는 일품요리로 적당히 때웠다. 한 가지를 위해 다른 몇 가지 일을 포기한 덕에 여유로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둘째는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대충, 허투루 하지 말아야 한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런데 '최선'이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일을 대하는 자세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결과는 나의 선택밖에 있다. 최선을 다 했다면 그걸로 만족하자. 더 좋은 결과는 다음으로 미루자. 경험을 더 쌓거나 공부를 더 해서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열심히 한다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다 다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내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의 일은 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내 일에 집중하자.

 

 나이를 먹고 지혜가 생기니 삶이 한결 수월하고 여유롭다. 내가 나이를 헛먹지 않아서 감사하다.

 


 나이를 먹으니까 좋다, 거절할 용기가 생겨서 좋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의 기준을 갖고 찾은 오늘의 목적지는 '양재 시민의 숲'이다. 이곳은 우리 가족의 추억이 서린 장소다. 아이들이 어릴 때 주말마다 자연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그중의 한 곳이 '양재 시민의 숲'이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 사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궁금하다. '양재 시민의 숲'은 자전거로 왕복 40km를 넘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체력면에서도 부담이 없다. 한강에서 양재천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탄천 합수부는 어제 가봐서 익숙하다. 하지만 양재천 자전거 길은 초행이라 낯설다. 익숙함과 새로움, 그 둘이 주는 안정감과 긴장감의 어느 지점에 '양재 시민의 숲'이 있다. 그야말로 '딱'이다.


 '작심사일만 하기, 3일 차' 내 기준을 갖고 스스로 정한 그곳으로 나 '혼자' 간다. 혼자라서 외롭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요. 외롭지 않아요. 혼자라서 좋아요'라고 대답해 본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보다 '다 같이'를,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았다. 공동체의 목표에 나의 목표를 맞춰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너의 그 말투, 그 표정, 그 행동 정말 무례하고 거칠어. 집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못 배웠니? 부모님이 오냐오냐, 하며 키웠나 보구나. 너 훈련 좀 받아야겠다."   


 사람들이 던지는 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이제 그만 아프고 싶어서 나의 색깔을 지워나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아내려고 했고, 사람들의 요구에 100% 부응하려고 했다. 나의 노력에 사람들은 사탕 같이 달달한 칭찬으로 보답을 해주었다. "너 참 일 잘하는구나. 너랑 일하면 편해. 너에게는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대가로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게 된 대신 내가 뭘 원하는지, 나도 나를 모르게 되었다. 이런 내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고 싶어졌다. 사회화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 지워버린 나만의 색깔을 이제는 회복하고 싶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릭 프롬은 자유에는 두 가지 자유가 있다고 했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소극적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이고, 적극적 자유는 '~를 향한 자유(freedom to ~)'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려면 먼저 나를 짓누르는 분위기와 조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는, 그래서 나와 관계없는 일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아니오." "지금은 제가 여유가 없네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데서부터 소극적 자유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나의 요구'도 포함된다.

 "그렇게 거절하다가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냥 해. 할 수 있잖아." 나는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그냥 하라고 요구하는 나에게도 "아니. 난 못해. 난 할 수 없어. 나는 하고 싶지 않아."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거절, 또 거절한 결과 나는 자유를 얻었다.  내가 얻은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 '소극적 자유' 다. 이제는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진짜 자유'를 실현해야 할 때다.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나이를 먹으니까 좋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서 좋다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도착한 '양재 시민의 숲'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 때문인가. 적막을 깨고 나무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반갑다. 우거진 나무에 가려 빛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그런지, 숲 전체가 그늘져 보인다.


 한강의 둔치 공원이 강과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면 이곳은 나무들에 의해 외부 세계의 소음과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닫힌 세계 같다. 자연이 만들어낸 닫힌 공간에서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시고 있으니 마음이 상쾌하다.


 닫힌 숲 속에서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가며 호흡에 집중하고 있을 때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나,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는 나,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을 창조적으로 보내 줄 아는 나, 혼자 있을 때 방전된 에너지가 채워지는 나. 그렇게 채워진 에너지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동안 왜 몰랐을까. 내가 많이 외로웠겠다.


 닫힌 숲 안에서 다시 만난 나에게 말해 본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동안 잘 버텨주어서.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보자"


 이 한 마디에 응어리진 가슴이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응달을 비추는 빛처럼, 빗장이 풀린 내 마음 안으로 행복의 기운이 쏟아진다. 기운이 넘친다. '양재 시민의 숲'으로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양재 시민의 숲'을 벗어나 집으로 간다.


 나에게 자전거란, 그냥 취미 생활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나는 나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나에게 자전거는 특별하다. 나이를 먹으니까 좋다. 자전거를 배워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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