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7월 5일 화요일
D-5
창고에서 캐리어를 꺼내 바퀴를 굴려봤다. 데굴데굴. 아직 쓸 만했다.
이제 앱으로 비자를 만들 차례였다. 휴대폰을 여권 사진에 갖다 댔다.
천장 불빛에 사진이 반사됐다. 벽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휴대폰 렌즈로 사진 속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하게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여행이 맞는가. 생각했다.
하루라도 그녀를 더 볼 수 있다면.
맞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사진을 캡처하는데 성공했다.
일 년짜리 비자였다.
이별에 필요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7월 8일 금요일
D-2
카페에서 누아는 이어폰을 끼고 통화 중이었다.
내가 옆에 앉자 살짝 눈인사를 했다.
쏼라 쏼라. 그녀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왠지 나는 쑥스러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 명이라도 영어를 제대로 한다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둘 다 버벅거리면 곤란하지. 아무리 이별 여행이라지만 말이다.
나는 일어나서 카운터로 갔다. 아아 두 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아를 마셔댔던가.
커피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왔다.
하아유. 그녀가 말했다.
왜 그래.
왜긴. 대답해 봐.
우리끼리 왜 그러냐고.
우리끼리니까 연습을 해야지.
막상 닥치면 하게 되겠지.
너는 그게 문제야.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어.
걱정 마. 나 영문과 출신이야.
그러니까 해보라고.
아임 파인 쌩유! 됐냐?
아이. 구려. 요새 누가 그렇게 대답하냐?
그럼?
아임 굿. 유?
굿을 해라. 굿을 해.
나는 여권을 꺼내며 물었다.
비자 받았어. 너도?
응.
그럼 뭐가 남은 거지?
출발.
그게 다겠지?
다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7월 10일 일요일
D-day
공항에 나타난 누아는 패딩을 입고 있었다.
심하다. 내가 말했다.
호주는 겨울이야. 미리 대비를 해야지.
그건 대비가 아니라 완전무장이지.
환전이나 하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공항을 걸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이 대부분 밝았다.
9:1 정도. 슬픈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마도 9와 1 사이에 속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인지도 몰랐다.
환전 창구에 지폐를 밀어 넣었다. 창구 직원이 알아서 호주 달러로 바꿔줬다. 산수가 약한 나는 대략 호주 달러에 천을 곱해서 계산하기로 했다. 그때 그녀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왜?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나도 바꿔야지.
왜?
왜 자꾸 왜야?
너가 내 여행 경비 다 내줄 거야?
물론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호주 달러 2백50불씩 환전했다. 합해서 500으로 딱 떨어져서 좋았다.
둘 다 돈이 풍족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사내 번역가를 그만두고 하는 여행이었다. 나는 무려 시인 아닌가. 그래도 그녀와 내 것 너 것을 나누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는 체크인 창구로 갔다.
일행이세요?
네.
우리는 분명히 일행이었다.
싱가포르를 거쳐서 시드니로 가는 티켓을 받았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내가 복도자리를 원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배정받았다.
짐을 체크인하고 출발 게이트로 향했다.
대기 줄 앞에 선 남자가 배웅 나온 여자와 눈물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잘 있어.
건강해야 돼.
사랑해.
나도.
아마 10%에 속하는 슬픈 사람들 같아 보였다. 남녀는 말을 못 잇고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힐끔 누아를 돌아봤다. 누아는 남녀를 외면한 채 공항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지. 나는 생각했다. 문제를 외면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일 수도 있지.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배웅하는 사람들과 갈라진 승객들이 출발 게이트가 있는 위층 창문에서 서성이는 게 보였다. 창문에 손바닥을 댄 채. 이마를 붙인 채. 코를 뭉갠 채.
나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없었다. 앞에서 흐느끼는 남녀가 내 감정의 골을 확장시켰다.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줄이 점점 줄어들었다. 앞에 있던 남녀는 거의 통곡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애에.
나도오오.
일주일만 참아아아.
너도오오.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일주일이라. 촉촉해진 눈가가 금세 말라버렸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부여잡고 서로 놔주지 않았다. 여권을 검사하는 직원이 겨우 둘을 떼어냈다.
나는 앞 남자를 피해 다른 검색대로 갔다. 왠지 그 남자가 꼴 보기 싫었다. 누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내 뒤를 쫓아왔다.
그녀가 검색대를 통과할 때 삑삑 소리가 났다. 검색원이 그녀의 머리에 꽂힌 금속 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머리핀을 빼서 바구니에 넣었다. 검색대를 통과하고 그녀가 짐을 챙기며 머리핀을 다시 머리에 꽂았다. 내가 홍대에서 사준 머리핀이었다.
누아는 머리핀을 좋아했다. 그녀 머리핀의 90%는 내가 사준 것이리라.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구찌. 빈폴. 엠엘비. 유명 브랜드샵들을 지나쳐 면세점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화장품 쪽과 술 담배 쪽. 나는 그녀를 만난 후 술은 늘었고 담배는 줄었다. 그녀가 술은 좋아하고 담배는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 담배를 한 보루 샀다. 왠지 이번 여행에 필요할 것 같았다. 면세점 안을 한 바퀴 돌아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빈손이었다. 왠지 머쓱해졌다.
누아는 뭔가 할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는 모습이었다. 담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내심 그녀가 담배를 피길 원해왔다. 왠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여자를 보면 멋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견을 내비칠 때마다 그녀는 내게 담배를 끊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술 핑계를 댔다. 너가 술 끊으면 내가 담배를 끊을게.
그러면 피우든지. 백해무익.
그렇게 우리의 술과 담배는 팽팽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담배를 펴도 되는 것인가. 슬펐다. 나는 담배 보루를 백팩에 쑤셔 넣었다.
우리는 26번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에 도착하자 안내문자가 보였다.
SQ178. 시드니.
창 너머로 떠날 준비를 하는 비행기가 보였다.
우리는 대기석에 앉아 창밖을 봤다. 우리의 비행기는 어디 있을까.
*
기내에는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었다. 그중에도 동남아인과 한국인이 많이 보였다.
이륙 얼마 후 저녁식사가 나왔다. 나는 치킨, 누아는 비프를 먹었다. 서로 조금씩 나눠먹었다. 누아가 마시는 화이트와인을 보자 왠지 레드와인을 시키고 싶어졌다. 나눠서 먹으면 좋으니까. 우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레드와인도 시켜줄래? 내가 누아에게 말했다.
너건 너가 주문하지 그래?
아직 입이 안 떨어져서 그래.
입이 언제 떨어질 건데?
비행기에서 내리면 될 거 같아.
누아가 턱을 쳐들고 마시던 잔을 비우더니 레드와인을 두 잔 주문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와인을 마셨다. 나는 와인을 몇 모금 홀짝였더니 금세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 주량이 약해진 것 같았다. 기압이 낮아서 그런가.
식사가 끝나고 앞 좌석에 붙은 화면을 터치했다. 앞에 앉은 몸집이 작은 사람이 좌석을 뒤로 젖혔다. 바로 코앞에서 화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Licorice Pizza라는 영화를 골랐다.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영어라서 뭔 소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국어로 봤어도 이해하기 힘든 영화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아도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 많은 영화 중에 같은 영화를 고르다니.
나는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인연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누아는 영화가 아주 재미있다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숀 팬 영화를 번역한 적이 있지.
숀 팬?
알고 보니 영화의 주인공이었는데 마돈나랑 결혼한 적이 있었다. 누아의 설명 덕분에 안 사실이었다. 그럴 때면 누아는 삼십인 자기 나이보다 훨씬 원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영화에 열중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꾸 숀 팬과 마돈나가 생각났다. 둘은 왜 헤어진 걸까.
영화는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뭐 사랑 영화가 다 그렇지.
해피엔딩 아니면 새드엔딩.
누군가는 만나서 헤어지지만 누군가는 헤어지지 않는다. 끝까지 함께 한다. 죽을 때까지. 아마 사후에도 함께 하는 커플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언제까지일까. 그것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게 아닐까. 샴쌍둥이처럼 말이다.
사랑의 종착역은 샴쌍둥이.
*
창이공항은 넓었다. 인천공항보다 넓은 것 같았다. 인간들 종류도 많아 보였다.
T3에서 T1 터미널로 가기 위해 Skytrain을 탔다. 하늘기차라니. 밤이었지만 꽤 많은 상점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조금 들떴다.
우리는 말이 많아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국적을 맞히기 시작했다.
타이완. 누아가 말했다.
일본.
영국.
핀란드.
브루나이.
야. 너가 브루나이 사람을 어떻게 알아봐? 내가 말했다.
가서 물어봐. 맞나. 안 맞나.
누아의 말에 나는 우물쭈물했다.
우리는 무작정 걷다가 체력이 슬슬 고갈돼갔다. 남은 두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
싱가포르에선 타이거 맥주지. 그녀가 앞장서서 바에 들어갔다. 나는 따라갔다.
그녀가 메뉴를 보더니 바에서 곧장 나왔다. 나는 따라 나왔다.
너무 비싸. 누아가 말했다.
우리는 편의점으로 갔다. 빵과 레몬티를 사서 벤치로 돌아갔다.
내가 먼저 레몬티를 마셨는데 설탕물 맛만 났다. 누아는 내 말을 듣고는 레몬티를 한 모금도 안 마셨다. 얄미웠다. 겨우 시간을 때우고 게이트로 가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대체 무슨 줄일까. 알고 보니 시큐리티 체크를 하는 중이었다.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해서 빈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누아가 웃기에 따라 웃었다.
이름이 이상해. 누아가 말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지? 내가 말했다.
브루나이 같아.
잠비아 아닌가.
우리는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휴대폰 주인은 예상외로 중국인 여성이었다. 만약 휴대폰을 놔두고 호주로 갔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너 휴대폰 잘 챙겼지? 내가 말했다.
그럼.
보딩 안내방송이 나왔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 알아들었냐? 내가 말했다.
대충.
나는 휴대폰보다 누아를 잘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옆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영어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넷플릭스에서 영국 드라마를 더 봐야지. 잉글리시 악센트에 더 익숙해지도록.
아직 멀기만 한 곳. 오스트레일리아여.
롱 롱 어웨이. 파 파 어웨이.
먼 먼 미지의 땅이여. 웨잇 포 미.
영어로 시가 써지다니.
*
기내에 들어서자 미지의 땅에서 온 사람인 듯한 거인이 앞자리에 앉았다. 거인의 머리통이 천장에 닿을 듯 불쑥 솟아났다. 거인과 동행한 애인은 가운데 자리를 비우고 창가에 앉아있었다. 세 자리를 차지한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크게 들썩였다.
거인은 애인에게 팔을 뻗어 애정을 확인했다. 애인은 졸음을 참지 못하는 듯 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거인이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그 말소리가 내 귀까지 울려 퍼졌다.
나는 옆에 앉은 누아를 돌아봤다. 자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았다.
나는 꿈속에서 감히 손을 뻗어 거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거인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멀기만 한 나라에서 왔나요? 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거인이 대답했다.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당신이 추울 때 덥고 당신이 더울 때 춥습니다.
코알라를 만진 적이 있나요?
네.
캥거루 주머니에 들어간 적이 있나요?
아니오.
누운 사람은 애인인가요?
그렇소만?
거인의 달라진 말투에 위축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냄새 좋네. 언제 깼는지 누아가 말했다.
기내식을 담은 카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쿠트항공도 환승 승객에게는 무료 식사가 제공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메뉴는 카레밥이었다. 길쭉한 쌀과 인도 카레였다.
못 먹겠다. 누아가 말했다
나도 수저를 놓았다. 유료 식사메뉴는 먹음직해 보였지만 우리는 시도하지 않았다.
이제 도착지가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