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day 1
7월 12일 화요일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렸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빙빙 도는 짐을 찾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시드니 냄새를 맡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단 공항 로비 의자에 앉아 숙소로 가는 방법을 검색했다. 그 와중에 휴대폰의 데이터 로밍 200메가가 사라졌다. 덜컥 겁이 났다. 데이터를 다 써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물며 여행 계획은 내게 맡기라고 누아에게 큰소리를 친 상태였다. 결국 유심을 구입하기로 했다.
누아에게 짐을 맡기고 로비를 걸었다. 텔심Telsim 부스가 보였다. 내가 원했던 브랜드는 옵터스Optus였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부스에는 인도 남자로 보이는 상점 주인이 혼자서 손님과 대화 중이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선 채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둘에게 방해가 안 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새치기를 당하지 않을 만한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인이 마침내 내게 눈길을 던지며 미소를 띠었다.
캔 아 핼프 유?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문이 막혔다.
심카드. 겨우 입이 떨어졌다.
얼마나 머무릅니까?
원 위크.
주인은 10기가를 추천했다. 나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듣다 보니 그 정도 용량이 필요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휴대폰을 건네주자 그가 신속하게 심카드를 갈아 끼웠다.
나는 누아에게 돌아가서 새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녀는 시험 삼아 내게 전화했다. 바로 옆에서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잘 들려? 누아가 말했다.
잘 들려.
누아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더 하면 안 되나.
나는 서둘러 숙소로 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새 심카드가 위력을 발휘했다. 조악한 공항 와이파이 대신 4G 통신망을 이용했다. 우버보다 요금이 싼 디디 택시가 후보에 올랐다가 결국에는 기차가 낙점됐다. 비용을 아껴야 한다는 공감대가 우리 사이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짐을 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내가 앞장섰다. 기차 사인을 따라갔다. 시드니 교통카드인 오팔Opal 카드를 구입하고 1번 플랫폼으로 향했다.
타운 홀Town Hall 행 기차를 놓치지 않고 올라탔다. 2층으로 된 기차였지만 짐 때문에 1층에 서있었다. 다리로 캐리어 바퀴를 고정시킨 채 서있으려니 몸에 힘이 들어갔다. 누아에게 빈자리를 권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비행기에 오래 앉아있어서 이제 서 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목적지인 뮤지엄Museum 역에 내렸다. 지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양손에 두 캐리어를 들었다. 누아는 자신도 거들겠다고 했지만 나는 극구 사양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이마에 땀이 맺혔다.
리버풀Liverpool 스트리트를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행인과 차들이 북적댔다. 우리가 끄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유난히 요란하게 들렸다. 나는 낯선 거리 풍경에 긴장된 상태였고 휴대폰 지도를 따라가느라 피로감이 더했다.
몇 블록 걷자 한국 상점 간판들이 나타났다. 좀 안도했다. 그저 한글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목적지인 메리톤 켄트 스트리트Meriton Suites Kent Street에 도착했다. 넓은 로비에 몇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체크인을 진행할 수 있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한 직원은 룸키를 전해줬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3층으로 갔다.
내가 숙소 문을 열었고 누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와. 좋다.
나는 방보다 그녀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들었다. 피곤했지만 숙소에 들어온 안도감에 다시 힘이 났다. 누아가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 짐정리를 하고 다음 스케줄을 짰다. 아직도 밖이 환했다.
우리는 집 근처 하이드 파크Hyde Park로 향했다. 뮤지엄 역을 다시 거쳐 갔는데 아까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이드 파크는 넓고 푸른 잔디를 따라 방사형으로 길이 나있었다. 누아가 탁 트인 전경에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나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는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줄지어 선 열대성 나무들을 만져보기도 했다. 파크 끝에는 큰 성당이 있었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5시였지만 주위가 이미 어둑했다.
첫날이니까. 내가 말했다.
무리하지 말아야지.
누아도 동의하며 먼저 돌아섰다. 이번에는 내가 누아를 쫓아갔다.
숙소가 가까워지자 왠지 아쉬웠다.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너 원숭이 좋아하지? 누아가 말했다.
나는 누아가 손으로 가리키는 간판을 돌아봤다. 3 Wise Monkeys.
특이한 이름의 펍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아가 어느새 펍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급히 따라 들어갔다.
우리는 이층에 겨우 빈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주문을 하려고 했지만 둘 다 움직이면 자리를 뺏길 것 같았다. 가위 바위 보를 했고 내가 졌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바텐더에게 호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IPA를 달라고 했다. 맥주에 호기심이 많은 누아를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맥주를 따르는 탭 중 아무 거나 하나를 가리켰다. 안주로 치킨 핑거를 시킬 때는 닭 흉내를 잠깐 내기도 했다.
맥주는 심심했고 치킨은 그저 그랬다. 우리는 좀 실망스러웠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구석 자리에서 크게 웃어댔다. 누아가 술집 벽에 그려진 세 마리의 원숭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Hear No Evil.
See No Evil.
Speak No Evil.
세 원숭이가 각각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있는 그림이었다. 누아가 인터넷을 뒤졌다.
도를 깨달은 원숭이들. 일본 사원에 있는 조각상이래.
원숭이가 사람보다 낫네.
술을 마셔야 저렇게 된다는 건가.
누아가 그 말끝에 건배잔을 들었다. 우리는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아무래도 술맛이 싱겁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원숭이를 뒤로 하고 펍을 나왔다.
이렇게 어중간한 상태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길 건너편 쇼핑 건물인 월드 스퀘어World Square로 갔다. 슈퍼마켓 콜스Coles에 들어가서 스콘, 쿠키, 그리고 한국에서 못 보던 치즈를 샀다. 하지만 술을 가게에서 판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아의 안색이 하얘졌다. 다행히 옆에서 사태를 직감한 아시안 점원이 술 파는 가게를 알려줬다.
우리는 콜스 바로 옆에 있는 리쿼 랜드Liquorland에 가서 와인을 샀다.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호주가 전반적으로 물가가 높아서 돈에 대한 경각심이 들었다. 누아가 10불이 안 되는 와인을 두 병 골랐다.
바디감이 좀 있네. 누아가 선반에 붙어있는 제품 설명서를 보며 말했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피노와 누아로 부르지만 와인을 마실 때 특별히 피노누아Pinot noir 품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 누아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나한테 누아르 분위기가 나지 않냐? 그녀가 물었다.
응. 조금.
그럼 나는 누아. 너는 피노라고 하자.
벌써 3년이 지났다. 아.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와인을 땄다. 누아는 자신이 쓸 여행기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뭐든지 경험이 필요해. 많이 먹고 마시고.
많이 다니고. 나는 그렇게 동감을 표시했다.
한 병만 마시자고 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두 병을 다 비웠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누아의 여행기나 내 시가 잘 써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현명한 원숭이들을 떠올렸다. 그놈들은 사랑도 현명하게 할까. 나는 누아를 쳐다봤다. 우리는 어떤 원숭이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