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초이 Dec 12. 2023

트라비아타

시드니 day 3

7월 14일 목요일


창밖으로 비가 쏟아졌다.

53층에서 바라보는 시드니 시내가 축축했다.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그쳤다. 숙소 옆 미용실에서 내 머리 커트 예약을 했다. 그동안 찍은 내 사진의 헤어스타일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누아와 달링 하버Darling Harbour를 가기 위해 서쪽으로 걸었다. 하버 이름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현재 우리 상황에 어울리는 이름인가.

달링이라.

혼자 중얼거리자 누아가 돌아봤다. 분명히 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뭐든지 간에 너무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가는 길에 차이나타운을 거쳤다. 세계 어디에나 있는 장소라 특별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패스.

커피가 마시고 싶어 별점이 높은 카페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용감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게 뭔데요? 직원이 갸우뚱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롱블랙Long black을 추천하며 말했다.

아메리카노와 가장 비슷할 거예요.

카페라떼는요?

플랫화이트Flat white라고 하죠.

친절한 직원 덕분에 무사하게 주문을 마치고 누아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너는 이 나라에 아메리카노가 없는지 알았냐?

응.

카페라떼도?

그럼. 롱블랙이랑 플랫화이트잖아. 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얄미운 것. 나는 생각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별점만큼 맛이 있는 집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간간이 들러 점원들과 담소를 나눴다. 우리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커피를 음미했다.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피시 마켓Sydney Fish Market으로 향했다. 근처에 가까워지자 비린내가 진동했다. 송아지 만한 새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바닥에 널린 생선들을 먹고 덩치를 키운 듯했다.

건물 안에 조성된 식당가는 인파로 넘쳐났다. 그렇게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취약한 나는 먹는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누아를 위해 견뎌냈다. 

우리는 야외에 비어있는 자리에서 굴튀김과 몇몇 생선을 먹었다. 갈매기들이 서성대며 우리가 먹는 광경을 지켜봤다. 우리는 갈매기들을 약 올리려고 음식을 깔끔히 해치웠다. 

실망한 갈매기들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나는 헤어 살롱에 들렀고 누아는 힘들다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타이완에서 왔다는 미용사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안경을 벗고 있던 나는 실시간으로 변하는 내 머리 모양에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그때 어디선가 누아가 나타나서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재밌잖아.

뭐가 재밌어?

누아가 킥킥거렸다.

마침내 완성된 내 헤어스타일은 도저히 사진에 담아서는 안 될 정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미용사가 이발요금이 50불이라고 했을 때 나는 남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실의에 빠져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아는 이발 전후의 내 모습에 별 차이가 없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전혀 와닿지 않았고 그녀가 내 외모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더 우울해졌다.

그래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조앤 서덜랜드 씨어터Joan Sutherland Theatre에 예약해 둔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양복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정장으로 차려입었다. 누아는 옷을 더 많이 가져왔어야 한다면서 투덜거렸다.

우리는 최단경로로 걸어서 오페라 하우스에 갔다. 둘 다 생전 처음 접하는 오페라였다. 마지막 여행길에 첫 번째로 함께 하는 것이라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공연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밤에 보는 시드니 하버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우리는 공연장의 묵직한 빨간 도어를 열고 들어가서 써클 섹션에 나란히 앉았다. 무대 앞에서 오케스트라가 음을 조율하고 있었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나는 금세 강렬한 무대 미술과 음악에 빨려 들었다. 힐끗 누아를 돌아봤다. 어두웠지만 그녀도 내 기분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감동은 1막 내내 지속되다가 2막에서 수그러들었다. 부모로 인해 자식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이야기였다. 반면 남녀 주인공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저절로 우리의 지금 상황이 떠올랐다. 누가 개입한 것도 아니고 반대하지도 않는 우리 관계. 유일한 걸림돌은 우리 자신일 뿐. 오케스트라 연주와 배우들의 목소리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무대 한가운데 서있는 나.

죽어가는 비올레타Violetta Valéry와 괴로워하는 알프레도Alfredo Germont 사이에서 나는 양쪽을 두리번거렸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위로했다. 마지막에는 안타고니스트였던 알프레도의 아버지 조르조Giorgio Germont까지 찾아와 슬픔을 공유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객석을 바라봤다. 조명이 짧게 깎인 내 머리통으로 내리 꽂혔다. 관객들이 내게 어떤 말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유약했고. 과묵했다.

나는 내 소심함을 관객들에게 호소하며 막연히 그들의 관대함에 기대를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어두워서 알아볼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명. 낯선 시드니에서도 나를 인정해 주는 한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보려고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껌벅일수록 시야는 조명 빛에 어두워졌다. 눈이 시렸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다시 객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막이 내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났다. 지휘자가 무대로 올라와 배우들과 인사를 했다. 나는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막이 내린 무대를 지켜봤다. 그녀가 말을 걸 때까지.

안 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극장을 나왔다. 시드니의 밤거리는 추웠다.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써큘러 키에 가서 기차를 탔다. 유리창에 비친 누아와 나를 봤다. 서울의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모습과 다를 게 없는. 한때는 자주 봤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그 모습을 시드니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옛날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과연 같은 우리일까.

뮤지엄 역에 기차가 섰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간격이 무척 짧았다. 아무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뮤지엄에 전시된 사람들처럼 승강장에 우뚝 섰다.


이전 03화 씨솔트 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