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day 4
7월 15일 금요일
누아가 목이 아프다고 했다. 일단 내가 가져온 한국 약을 먹었다. 그녀는 호흡기가 민감해서 평소에도 조심하는 편이었다.
샤워부스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방을 변경하기로 했다. 나는 미적거렸지만 누아가 밀어붙였다. 짐을 프런트에 맡기고 뉴사우스웨일즈 주립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으로 향했다. 누아도 여행기를 써야 했고 나도 시를 써야 했다. 우리의 의무를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마틴 플레이스Martin Place를 지났다. 이제 시드니 시내가 좀 익숙해졌다.
거리에 있는 식당은 비싸다는 판단에 푸드코트로 들어갔다. 그중 한 곳을 골라 아보카도와 치킨 랩을 먹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송아지도 먹을 수 있었다.
맛있다. 내가 말했다.
그치?
사실이었다. 먹다 보니 나도 식욕이 생겼다.
주립도서관은 넓고 쾌적했다. 노트북 이용 장소도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명시가 탄생할 것 같았다. 애초에 시드니에서 카페를 다니며 글을 쓰고자 했던 우리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내 노트북과 그녀의 아이패드를 한 어댑터에 연결했다. 오랜만에 한글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시상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시드니에서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나 자신도 궁금했다. 귀로 들리는 건 영어인데 한국어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게 어색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 말이 들릴까. 누군가에게. 호주사람들에게는 안 들리겠지. 영어로 해야 될까.
누아가 커피를 두 잔을 사 왔다. 그녀는 낯선 장소에서도 뭐든 서슴없었다.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양이 적네. 씁쓸하구나. 그런 식으로 나는 아무거나 타이핑을 했다. 별 소용이 없었다. 의욕은 컸지만 글의 진전이 없었다.
누아는 휴대폰으로 뭔가 열심히 찍어댔다. 잠시 후 그녀는 약속이 생겼다고 했다.
시드니에서?
그럼 서울이겠니?
시드니에서 누굴? 나는 안 놀라는 척하느라 힘들었다.
옛 직장 동료야. 여기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해.
그렇구나.
나는 그 사람의 성별을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디로 가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싱숭생숭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나오는 길에 아주 옛날부터 사용되던 열람실을 발견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했다. 책과 도서관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놀라웠다. 하지만 잠시였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숙소로 가는 길에 콜스에 들려 치즈와 스낵을 샀다. 리쿼랜드에서 와인도 샀다.
숙소에 들어서자 직원이 나를 반기며 아침에 변경 신청을 했던 방이 정해졌다고 했다. 무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며. 하지만 그건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바뀐 방에서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창밖 풍경을 봤다. 와인 한 병을 다 마실 때쯤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방 번호가 뭐야?
얼마 후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며 업그레이드된 방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에 나는 순간 흐뭇했지만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어디서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던 걸까.
어. 와인 다 마셨네.
그녀가 내 잔에 남은 와인을 마시더니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목이 다 나은 거야?
응. 한국 약이 효과가 좋네.
그녀는 피곤하다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그녀가 누운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약이 약효가 있는 거야? 만난 사람이 약효가 있는 거야?
내 말에 그녀는 깔깔대기만 했다. 그리고는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약효가 없었다. 갑자기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봤던 꽃을 든 소화 테레사가 생각났다. 소화 테레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약을 쓴 것일까. 그게 사랑의 약이라면 내가 가진 건 왜 효과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간단한 시상을 떠올렸다.
당신의 감은 눈에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지금 꿈을 꾸는 사람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