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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초이 Dec 16. 2023

보오오오오오링

시드니 day 5

7월 16일 토요일


누아의 목 상태는 나아졌지만 대신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피트니스 룸으로 갔다. 웨이트와 러닝을 좀 하고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개인 전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수영장 레인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수영을 끝내고 물을 뚝뚝 흘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바닥에 내 발자국이 남았다. 몇일만에 하는 운동이라 개운했다. 

방에 돌아오니 누아가 일어나 있었다. 주말에만 문을 여는 더 락스의 벼룩시장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안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녀가 푹 자고 나서 괜찮아졌다면서 가자고 했다.

우리는 숙소를 나섰다. 트램 대신에 도보를 택했다. 조지 스트리트에 있는 유니클로에 들러서 내 벨트를 샀다. 바지가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살이 빠진 것이라면 좋은데 튀어나온 아랫배에 걸쳐진 바지가 자꾸 헐렁거렸다.

더 락스에 도착하자 골목마다 들어찬 노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트 전시, 액세서리, 먹거리, 입을 거리가 줄지어 있었다.

뭐 살래?

누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 사줄게. 그녀가 고집을 부렸다.

벨트 샀잖아.

그건 그냥 필수품이잖아.

괜찮아.

나는 사양했다. 뭔가 뇌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길리안 초콜릿 카페Guylian Belgian Chocolate Café에서 팬케이크와 아포가토를 먹었다. 코코아 잔을 든 그녀의 얼굴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빛이 났다. 순간 스쳐간 생각. 그녀는 카멜레온인가. 

누군가의 속마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겉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시시각각 변하지 않는가. 원자핵 주위를 떠도는 전자의 움직임과도 같았다. 쉬레딩거의 고양이. 그녀는 과학이고 우주였다. 

별 수 없지. 나는 그녀를 끊임없이 탐구할 뿐.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커스텀스 하우스 라이브러리Customs House Library에 갔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데 도서관이 있지? 내가 물었다.

시드니 항구에 드나드는 배들로부터 관세를 거둬들이는 곳이라고, 누아가 번역가답게 표지판을 보며 설명했다. 그런 건물에 도서관이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녀는 도서관으로 향하다가 자신의 여행기에 뭔가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도서관에 대해 써야겠어. 세상에 이렇게 멋진 도서관들이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그녀를 따라 리딩룸으로 들어갔다. 긴 테이블이 줄지어있었고 고풍스러운 램프가 테이블마다 놓여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콘센트가 당연히 없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책상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래 있네.

나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어댑터를 끼우며 생각했다.

놀라운 그녀. 어떻게 콘센트를 발견했지. 나는 금세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도 매력이지.

우리는 한동안 각자 작업을 했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녀는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저 또한 매력인가. 

나는 그녀가 깨길 기다리며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봤다. 

마침내 그녀가 깼다. 우리는 도서관을 나왔다. 길을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포천 오브 워를 못 갈 것 같아. 

우리가 가기로 했던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이었다.

괜찮아.

원하면 너 술 마시는 거 구경해 줄게.

너 사실은 가고 싶구나? 내가 말했다.

아니야.

조금만 마시든지.

싫다구!

왜 화를 내냐.

그녀는 몸 상태로 인해 술을 못 마셔서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우리는 곧장 숙소로 가서 쉬기로 했다. 가는 길에 콜스에 들려 신선한 과일과 요거트를 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다음 날 스케줄도 변경했다.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s까지는 무리였다. 두 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야 하니까. 대신 가까운 맨리 워프Manly Wharf에 페리를 타고 가기로 했다. 오팔 카드가 주말에는 반값이고 최대금액에 한도가 있어서 안심하고 쓸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교환했다.

사실은 포천 오브 워에 가고 싶었어. 그녀가 말했다.

나도.

이름부터 심상치 않잖아.

무슨 뜻이야.

포천 오브 워. 전쟁의 운명?

멋있네.

시적이다. 시인 선생. 서사시 하나 읊어보시지.

나는 뜸을 들이다 한 수 읊었다.

전쟁의 운명이라고만 말하지 마라.

사랑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이길지 질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전쟁에 뛰어들 뿐 그다음은 하늘이 주는 운명이다.

누가 운명을 알겠는가.

하늘이 우리에게 말해주기 전에는.

낭송을 마치자 누아가 박수를 쳤다.

진작 그렇게 쓰지 그랬어.

그러면 뭐가 달라졌나.

모르지.

뭘 몰라.

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내가 시를 못 써서 세상이 이 모양인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모양이 뭐 어때서?

세상이 정상이 아니잖아.

정상이 아닌 눈으로 보니까 정상이 아니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정상이 뭔데? 나만 정상이 아니야? 그놈은 그럼 정상인가?

누구?

너가 만난 남자!

그녀가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내가 이러니까 널 떠나는 거야!

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이유를 대든지 나를 떠났을 것이다. 지겨웠으니까. 삼 년이라는 시간이. 보오링해졌으니까.

밖에서 폭죽소리가 들렸다. 달링 하버에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각자 창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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