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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초이 Dec 19. 2023

카르페디엠

시드니 day 6

7월 17일 일요일

       

누아의 약을 사러 아침 일찍 케미스트 웨어하우스Chemist Warehouse에 갔다. 아무래도 한국 약이 더 이상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본 약을 선반에서 고른 후 계산을 했다.

문을 연 카페를 뒤져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 오랜만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생각이 한 군데로 모아졌다. 나를 두고 딴 남자를 만나서 감기가 도진 거지. 쌤통이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호주 하늘에 내가 만든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자 누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깨워 약을 먹이고 혼자 운동을 하러 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웨이트, 러닝, 수영을 하기로 했다. 자쿠지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이미 그 안에서 알콩달콩 하고 있던 커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수영을 하면서 몸이 부드럽게 움직인다고 느껴졌다. 왠지 그 동작을 누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와 처음 수영장에 함께 갔을 때 서로의 몸을 보며 쑥스러워했던 기억에 혼자 웃음이 났다. 레인을 무심결에 몇 번 왕복했더니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났다. 평소에 운동부족인 듯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에 돌아와서도 같은 증상이 이어졌다. 할 수 없이 그녀 옆에 누웠다. 그녀의 체취를 느끼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한동안 자고 났더니 둘 다 컨디션이 좀 회복된 듯했다.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써큘러 키까지 가서 페리를 탔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드니 하버는 엽서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섭씨 20도의 청명한 날이라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접착식 선글라스를 안경에 끼웠다. 폼을 잡고 그녀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녀는 순순히 사진을 찍어줬다.

맨리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인상은 휴양도시 그 자체였다. 부두에서 비치까지 이어진 보도 양쪽으로 갖가지 상점이 들어서있었다. 뭐라도 먹거나 사게끔 만드는 분위기였고 우리도 영락없이 휩쓸렸다. 젤라또 가게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어떤 가게 앞에 늘어선 긴 줄에 우리도 동참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아이스크림을 두 스쿱 사 먹을 수 있었다. 아이리시 크림 앤 아몬드와 솔티드 캐러멜 맛. 우리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놓고 번갈아가며 핥았다. 오랜만이었다.

맨리 비치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모래사장은 새하얬다. 눈이 부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비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앉아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봤다. 서핑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쌀쌀한 날씨 때문에 아무도 바다에 없었다.

무슨 생각해? 내가 물었다.

참 좋구나 하는 생각. 너는?

난 너가 무슨 생각하나. 그 생각했어.

그런 생각 이제 그만해.

왜?

자기 생각만 하자.

왜?

그게 각자에게 좋으니까.

나는 바닥에 깔린 모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누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구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맨리 뮤지엄Manly Art Gallery and Museum에 들렸다. 전시 작가가 관람객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그 주위를 서성이며 그림과 전시물들을 구경했다.

페리를 타고 시드니 하버로 돌아왔다. 둘 다 피곤해서 트램을 탔다. 주말은 오팔 카드가 반값이기도 한 까닭도 있었다. 한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쇼핑몰에 숯불구이 야키니쿠 식당에 가기로 했다.

무려 한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입장했지만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서비스도 엉망이었다. 1인분만 먹고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가까이에 있는 스포츠 바에 갔다. 이제 둘 다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시앤 칩스와 생맥주를 터치스크린으로 주문했다.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것보다 얼마나 편한지. 그리고 호주 풋볼 게임을 봤다. 생소한 종목이었지만 왠지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면이 있었다. 경기장에 가서 직접 관람하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엉클 텟수에 들러서 일본식 치즈 케익을 샀다. 누아가 맥주가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리쿼랜드에 들려 로컬 IPA 두 캔을 샀다.

숙소에서 포장해 간 음식과 맥주를 먹었다. 누아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뭔데?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우리 언제 돌아가지?

내일모레.

더 있다 가자.

뭐라고?

너가 괜찮다면 그렇게 하자.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더 물으면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취소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어디로 갈 건지 고민했다. 시드니 위로 가느냐 아래로 가느냐.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더 따뜻한 쪽으로 가기로 했다. 골드코스트와 브리즈번을 스케줄에 넣었다. 인터넷으로 귀국 비행기 표를 변경하느라 골치를 썩였다. 나는 운전을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숙소에서 부과하는 주차비가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별의 유예기간이 일주일 늘어난 것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순간을 즐기자. 카르페디엠. 그 말은 곧 이별을 즐겨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방문할 도시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밤이 깊었지만 나의 검색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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