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초이 Dec 09. 2023

씨솔트 칩

시드니 day 2

7월 13일 수요일


둘 다 늦게 일어났다.

나는 숙취가 남아서 개운하지 않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다. 우리 여행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조식으로 스콘과 쿠키, 요거트를 먹었다.

숙소를 나와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예보와는 달리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누아의 안색이 밝아 보여서 마음이 가벼웠다.

하이드 파크를 걸었다. 어딜 가나 영국에서 따온 지명이었다. 공원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전날 못 갔던 세인트 메리 성당St Mary's Cathedral에 갔다. 규모가 꽤 컸고 밤색에 주홍을 더한 호주만의 색깔로 건물 내부가 칠해져 있었다. 누아는 꽃을 든 소화 테레사 동상 앞에서 시간을 끌었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성당 특유의 향기를 맡았다.

성당을 나와 뉴사우스웨일즈 아트 갤러리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에 갔다.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Treasure Island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점으로 찍은 듯한 기법. 마치 색맹검사표 같기도 한. 알고 보니 호주 원주민 예술의 특징이었다. 군인, 풋볼 선수, 경찰을 묘사한 작품들도 있었다. 강하다는 인상을 주려는 걸까.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갤러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핫초콜릿, 레몬 타르트를 먹었다.

다음부터는 너가 주문해. 누아가 말했다.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러니까 하라고.

나는 큰소리를 쳤지만 약간 걱정스러웠다. 

카페에서 나오자 식물원으로 길이 이어졌다. 식물원은 생전 보지 못했던 열대 식물들로 가득했다. 생김새가 이상한 새들도 많았다. 누아는 새떼들이 나는 장면을 동영상에 담았다. 맥쿼리 벽Macquarie Wall의 흔적도 인상적이었다. 맥쿼리 주지사가 정부 구역을 마을과 구분하기 위해 쌓은 950피트의 벽 중 남아있는 일부였다.

식물원을 빠져나가자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와. 이게 뭐야. 태평양인가. 대서양인가. 누아가 외쳤다.

태평양이지!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누아가 자존심이 좀 상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크게 말한 점이 후회스러웠다.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나라 동해하고 같은 바다야.

너가 잘 아는 것도 있네.

나는 누아의 말이 좀 언짢았지만 웃어넘겼다.

해안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바다와 어우러진 공기가 매우 청명했다. 부리가 길게 구부러진 새와 갈매기가 함께 걸어 다녔다. 

어느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걸 실제로 보다니. 나는 누아에게 포즈를 잡으라고 외쳤다.

누아가 마지못해 포즈를 취하는 척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내심 그것을 원했음을.

오페라 하우스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소리가 악기 연주처럼 들렸다. 우리는 계단 여기저기 앉은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았다.

누아가 휴대폰으로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나는 내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헤어스타일 때문인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써큘러 키Circular Quay 부두에 들렀다. 몸집이 큰 배부터 아주 작은 배까지 다양한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다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건지.

부두 주변에 카페와 식당이 많았다. 우리는 사람들 물결에 휩쓸려 이리저리 걸었다. 누아가 거리에서 한 술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The Fortune of War. The oldest bar in Sydney.

하지만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사진만 찍었다. 낮술을 시작하면 밤까지 이어질 것 같다고 누아가 말했다. 보기 드문 반응이었다. 그녀는 대신 식사를 하자고 했다. 

누아는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편이었다. 나는 멋진 식당을 찾아내고 싶었다. 오랫동안 길에 서서 휴대폰 검색을 했다. 그 시간이 길어졌지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야. 그냥 가자.

누아의 재촉에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록스The Rocks라는 카페 거리가 나왔다. 주말에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날씨가 흐려져서 할 수 없이 숙소 쪽으로 발을 돌렸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걸으면서 줄곧 식당을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는 베트남 국수 어때? 내가 제안했다.

좋지.

누아의 반응에 나는 고무됐다. 역시 우리는 맞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맞지 않게 된 건가.

나는 곧 우울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울증 약을 챙겨 왔다는 사실.

우리는 조지 스트리트George Street를 따라가다가 몇몇 옷가게와 서점에 들렀다. 

누아는 책벌레답게 다이목스Dymocks 서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는 그동안 휴대폰으로 숙소 근처에 있는 베트남 식당을 찾아냈다.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쌀국수와 새우볶음밥을 먹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건너편 건물에 빽가네라는 한국식당이 보여 현실감각이 흐릿해졌다.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 내 마음이 감상적으로 변해갔다. 누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인지 중얼거렸다.

비도 오는데...

그냥 들어가기가... 나도 맞장구쳤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월드 스퀘어로 갔다.

콜스에서 마실 물과 함께 펄프가 가득한 오렌지 주스를 샀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했던 리쿼랜드로 갔다. 전날과는 다른 와인을 골랐지만 역시 10불을 넘기지 않았다. 로컬 맥주 두 캔과 씨솔트 칩, 나초도 함께 구매했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일단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는데 란제리 차림이었다. 나는 다시금 우리 여행의 목적을 떠올리며 당황스러웠다. 누아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우물쭈물하자 누아가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럼?

의미를 두지 말자.

나는 누아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얼른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누아의 행동을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미 내 안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아가 말한 의미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의미가 점점 무의미해졌다.

이전 02화 현명한 원숭이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