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코스트 day 4
7월 22일 금요일
눈을 뜨니 누아가 옆에 없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누아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 사실을 회피하는 나를 회피하고 싶었다. 어디로 간 걸까. 이번 여행은 역시 무리였던가? 우리는 삼 년 동안 수많이 다퉜다. 왜 또다시...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왔다.
멀리 가지 않고 아래층에 있는 센스 카페로 갔다. 비가 내리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다 카페에 모인 것 같았다. 예의상 오렌지 주스와 프렌치토스트를 시켰다. 토스트에 초코칩과 바나나가 들어있었다. 그때 카톡이 왔다. 누아였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와.
거기가 어디야?
큰 서핑 보드가 세워진 곳.
알았어.
나는 일단 대답을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금방 답이 나왔다.
카페를 나와 트램을 탔다. 비가 잦아들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 서퍼스 파라다이스 역에 내렸다. 해안 쪽으로 걸어가자 커다란 아치가 보였다. 사람들이 아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조금 더 걷자 서핑 보드 조각상이 나타났다.
그 앞에 누아가 서있었다. 큼지막한 서핑 보드 앞에 그녀가 서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아직 그녀가 어떤 심리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팔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바람이 세게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쪽 방향으로 휘날렸다. 나는 바람을 막아주려고 그녀 옆에 바싹 붙었다.
우리는 팔을 맞대고 걷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으로 얼굴이 따가웠다.
아 따갑다.
나도.
서퍼들의 천국이라면서도 서퍼들은 없었다. 이런 날씨라도 서핑에 도전하는 것이 진정한 서퍼가 아닌가. 아니다. 아무리 서퍼 할아버지라도 이 날씨에는 무리지. 누아가 사진을 찍다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우리는 서둘러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구경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이런 날씨에는 도서관이나 가야지. 누아가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우리는 곧장 트램을 타고 사우스포트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여섯 정거장 지나 트램에서 내렸다. 도중에 노상방뇨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순간 호주가 아니라 인도에 온 느낌이 들었다.
사우스포트 도서관은 지역도서관인 만큼 아담하고 정갈했다.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오늘 같이 감정의 굴곡이 있는 날은 근사한 시 한 편이 나올 것 같았다. 누아는 환경문제에 관한 책을 구해 와서 읽었다. 제목은 Beyond climate grief였다. 오늘 날씨에 어울리는 제목이었다. 누아는 자신이 원하던 책을 발견했다며 기뻐했다.
그렇게 좋아?
봐봐. 이 부제까지 마음에 드네.
그녀가 부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읽었다.
A journey of love, snow, fire and an enchanted beer can.
맥주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좋아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런가? 하하하.
누아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환경 관련 책인데 사랑을 언급한다는 것부터가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사랑도 환경의 요소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도 오래전에 오염이 됐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제 점점 오염이 심해져서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몰라. 그러면 사랑도 환경처럼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는 건가. 나는 사랑의 시를 쓰고 싶었지만 한 줄도 못 썼다. 내 뇌도 오염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나와 근처 마트에 갔다. 할인하는 신라면 5개 팩을 구입해서 가방에 넣었다. 트램을 타려고 가는 길에 인상적인 술집을 발견했다. Last Night on Earth.
와. 이름 좋네. 누아가 소리쳤다.
가볼까?
오늘은 자제해야지.
웬일이야? 내가 말했다.
아직은 마지막 밤이 되기는 싫어.
지구에 미련이 남았구나?
환경이 유지된다면.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밴드의 노랫소리가 밖으로 들려왔다.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걸까. 누아의 자제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마트에 들렀다. 전날 라면과 와인이 의외로 어울렸다는데 동감했다.
숙소로 돌아와 발코니에 상을 차렸다.
라면. 와인. 수박.
골드코스트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어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