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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초이 Jan 13. 2024

저주받은 아이

멜버른 day 2

7월 28일 목요일



숙소 52층에 있는 피트니스 룸에 가서 러닝머신을 달렸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땀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는 너는 누구냐. 자기 비하를 하면서 달리자 어느새 십오 분이 지나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누아에게 어젯밤 대화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이유나 전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말을 다시 되새기기 싫었고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문제점을 해결하기보다는 질질 끌고 가는 태도가 꼴불견이었다.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달리는 것뿐. 그렇게 생각했다.

달리기를 마치고 라운지에서 글을 쓰고 있는 누아에게 갔다.

끝났어. 내가 말했다.

응. 나도.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오늘 일정을 시작했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Victoria을 방문했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서관 입구 광장에 커다란 체스판이 있었다. 나는 킹 옆으로 가서 포즈를 취했다.

찍어봐. 누아에게 말했다.

웬일이야.

나는 어깨를 펴고 눈을 부릅떴다.

야. 힘 좀 빼.

누아가 나를 웃기려고 한 말 같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도서관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호화롭고 격식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빅토리아 여왕이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왕국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의 모습이랄까.

유서 깊은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자판을 찍어대는 맛이 있었다.

장엄한 서사시가 나올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공간이 너무 커서 좀 추웠을 뿐이다. 누아도 의견을 같이 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건물마다 쇼핑몰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 한 군데를 골라 거닐었다. 규모가 상당했다.

푸드코트에서 누들과 볶음밥, 치킨, 비프를 나눠먹었다.

구글에서 찾은 Lt. Nic 카페를 찾아서 핫초코와 롱블랙을 마셨다.

닉 중위 같이 생긴 남자의 미소는 강인하면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저절로 내 어깨를 펴게 만들었다.

주위 도서관은 다 들러보고 싶다는 누아를 따라 RMIT 대학에 갔다. 학교 건물들이 길에 세워진 오프 캠퍼스였다.

도서관 건물로 들어가자 젊은이들의 활력이 느껴졌다. 대학 도서관이지만 꽤 대규모였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공교롭게도 화재 경보 사이렌이 울려서 젊은이들과 함께 밖으로 휩쓸려 나왔다.

사이렌 소리를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라운지에 올라가서 작업을 했다. 

나는 시를 쓰려고 머리를 짜냈지만 소용없었다. 커피머신에서 카푸치노를 만들어 먹었다. 시를 만들어내는 머신도 언젠가 만들어지겠지. 그날이 오기 전에 불후의 시 한 편은 남겨야 할 텐데.

누아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오늘 갈 거지? 

어디?

해리포터.

그럼. 왜?

너 안색이 안 좋아서.

그냥. 시가 잘 안 써지네.

그래? 언젠가는 잘 써지겠지. 누아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잖아. 시라는 게.

시간보다는 집중력 같아.

집중이 잘 안 돼?

그럼 되겠냐,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응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우리는 연극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섰다.

프린세스 씨어터The Princess Theatre에서 공연되는 Harry Potter Cursed Child를 보기 위해서였다.

비에 젖은 거리를 걸었다.

무려 세 시간 반짜리 연극이라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집중이 안 되면 어떡하지.

예상대로 나는 공연 내내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영어 대사 때문이었다. 평상시 영어도 어려운데 연극 영어는 샹송처럼 들렸다. 미리 줄거리를 읽고 가라고 조언한 누아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인터미션까지도 오랜 인내가 필요했다. 이제 그만 보고 나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안 나왔다.

누아는 줄거리를 예습한 덕분인지 어느 정도 내용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인터미션 후 다시 막이 오르고 고난의 시간이 이어졌다. 유독 높이 솟은 앞사람의 머리통이 시야를 가렸다. 간혹 관객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유령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지루함을 걷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앞에 있는 금발 머리통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재미를 붙이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막이 내리고 배우들이 인사를 했다.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나도 열렬히 박수를 쳤다.

드디어 끝났구나.

극장 밖으로 나오자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멜버른 시내의 밤길을 걸었다. 

누아는 별 말이 없었다. 나라도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저주받은 아이가 누구야?

말포이 아니야?

그럴 줄 알았어.

누아는 다시 조용해졌다. 할 수 없이 내가 또 입을 열었다.

해리포터는 언제까지 후속 편이 이어질까?

독자가 있는 한.

그렇겠지. 내가 조앤 롤링처럼 될 수 있을까? 내가 말했다.

아니.

왜?

너는 피노가 될 수는 있겠지.

그건 이미 된 거 아닌가?

그래? 누아가 대꾸했다.

어쨌든 내가 나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이지?

난 너가 더 너가 되면 좋겠어.

그래. 그래야지...

나도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내가 한 말들을 후회했다.

극장부터 무리 지어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스트리트Elizabeth Street로 방향을 틀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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