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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초이 Jan 16. 2024

9 to 5

멜버른 day 3

7월 29일 금요일

               

시인은 모든 걸 시로 쏟아내면 되는 것이다.

말이 필요 없다. 글로 쓰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서 뒹굴었다.

누아가 누운 채로 말했다. 

도서관 가자.

나는 아무 대답 없이 몸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우리는 숙소를 나와 빅토리아 주립도서관으로 걸어갔다. 

도착해 보니 아직 오픈 전이었다.

할 수 없이 10시까지 도서관 카페 Mr. Tulk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롱블랙을 마시며 지중해식 계란 요리를 곁들였다. 그리고 브레드 스틱을 번갈아가며 토마토소스 하나에 찍어먹었다. 누아의 침이 묻은 것이기에 상관없었다. 아니. 삼 년 동안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아니지 아닌가. 그녀는 이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소스를 찍어먹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브레드 스틱을 한 입에 욱여넣었다.

왜 그래 갑자기? 누아가 놀라서 말했다.

더블 디핑 하지 마. 내가 말했다.

뭐?

누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누아는 일부러 브레드 스틱에 침을 묻혔다가 소스를 푹 찍어먹었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했다.

하지 말라고. 내가 말했다.

이유를 대봐.

비위생적이야.

야. 너랑 나랑 언제부터 위생을 따졌냐?

너랑 나랑? 내가 말했다.

그래.

우리가 아직도 너랑 나랑이냐?

그럼 뭔데?

우리는 너 따로 나 따로지. 이제 랑랑이 아니지.

누아가 나를 또렷이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따가웠다.

미키 때문이지?

아니야.

질투하니?

질투가 아니라 이건 예의의 문제지. 같이 있는 남자를 두고 딴 남자를 만나냐?

너도 같이 가.

뭐?

같이 가자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누아를 쳐다봤지만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누아가 먹다 남긴 브레드 스틱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왜 내 걸 먹어?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아가 따라 일어나며 계산을 했는데 현금이었다. 남은 호주 달러를 다 써버리겠다는 듯이. 이제 여행의 연장은 없다는 암시인가,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도서관 안을 거닐었다.

두 번째 찾는 거지만 아직도 이 도서관은 넓고 갈 곳은 많았다. 복도를 지나면서 체스를 즐기는 사람들도 발견했다. 우리는 아래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가방에서 아이패드와 노트북을 꺼냈다.

서로 마주 앉아 작업을 했다. 

물론 나는 그런 척을 했을 뿐이었다. 마음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누아랑 함께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 누아. 미키인지 뭔지.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서 뭘 하자는 것인가. 무슨 얘기가 오간다는 건가. 그냥 둘이 만나라고 할까. 

아니다. 나는 혼자 남아서 괴로워할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보는 거다. 맞닥뜨리는 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이상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어떤 거지가 우리 옆에 있는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냄새가 지독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누아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짐을 챙겨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냄새가 코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냄새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이 나타났다.

시간표를 보니 저녁에 피카소 전시와 함께 음악 공연이 펼쳐진다고 했다. 음악과 미술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야라강을 따라 걸었다. 

그동안 우리가 거쳐 왔던 호주의 강들이 생각났다.

나는 난간에 기대 흐르는 강물을 바라봤다. 갑자기 시상이 떠올랐다.

도시는 강을 따라 

추억은 물결 따라

새는 바람 따라 

발자국은 내 님 따라

내 님은 구름 따라 

우리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페더레이션 스퀘어Federation Square로 갔다. 

거대한 사람 눈알 모양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녀를 찍어줬고 그녀는 나를 찍어줬다. 같이 찍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연 시간에 맞춰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돌리 파튼의 9 to 5 뮤지컬 광고를 봤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누아가 아는 척을 하며 말했다.

나도 한때 저렇게 일했었지. 9시부터 5시까지.

지금은 자유롭잖아?

더 자유롭고 싶어.

더?

응. 더. 누아가 강조했다.

우리는 미술관에 입장했다. 전시라기보다는 파티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바에서 자유롭게 술을 마셨고 밴드 연주를 듣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했다.

전시장에는 피카소와 서로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라는 작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살바도르 달리 작품도 하나 있었다. 

달리의 쭈글쭈글한 시계가 7시에 가까웠다.

달리는 왜 저 시간을 그려 넣은 걸까.

누아는 어떤 자유를 더 원하는 걸까.

7시에 가까운 저 시간이 현실인가 초현실인가.

공연장에서 라이브 음악까지 흘러나와 시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전시장 한 켠에서 피카소의 작업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

그가 그린 massacre in korea 앞에서 저절로 발이 멈춰졌다. 현실이라는 것이 매우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또 무료 트램을 탔다.

불금이라 인파가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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